페디큐어(Pedicure)
유숙자
아이가 아프고 나면 재롱이 는다는데 나이 든 사람은 무엇이 늘까.
고열로 시달려 고생하면서 더딘 회복 기간에 떠오른 생각이다. 열이 내렸어도 한 차례 호되게 휘둘린 탓에 정신이 멍하고 체력도 식욕도 제로 상태다. 지금까지 흔히 들었던 '아직은 흰 머리가 없다. 얼굴에 주름이 별로 없다.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 주변에서 부러워했던 말에 백기를 들었다. 나이 들었어도 젊은 기분으로 살았는데 달포 가까이 맥을 못 추는 모양새는 허공에 떠 있던 내 의식의 현주소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열은 잠깐 사이 39도 이상 치솟았다. 이리저리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문이 닫혔다. 응급실로 향하던 차를 집으로 돌렸다. 토요일 응급실 상태를 하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기에 우선 열을 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해열제를 복용했다. 8시간 간격이라고 쓰여 있었다. 열이 내렸다가도 8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열은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월요일 주치의를 찾아가기까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폐렴에 가까운 급성기관지염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가택 치료 처방을 받았다. 그날부터 간호사가 왔고 6일 동안 주삿 바늘을 달고 살았다. 서너 시간이면 수액이 다 들어가건만 주삿바늘은 그대로 달아 놓고 갔다. 다음 날 저녁 간호사가 올 때까지 주사기는 손목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내 몸을 제한했다.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주삿바늘을 새로 꼽을지언정 자유로움을 택했을 건데 왜 시키는 대로 따랐는지 모르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들을 한다. 긍정도 부정도 해본 적 없다. 이번 내 경험으로 본다면 감성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신체 나이는 세월과 함께 감을 체험했다. 전과 다르게 회복이 더뎠다. 체중도 10여 파운드나 줄었다. 정신 상태가 약해져 우울 증세가 계속되었다. 갑자기 아픈 곳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걱정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아! 이제야 알겠다. 나이 든 사람이 아프고 나면 매사에 의욕이 없고 겁쟁이가 된다는 것을. 물론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평소 젊게 살았는데도 고열 한 방에 푹 사그라들었다. 살아갈 세월이 길지 않은 이제는 육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청정에 더욱 마음 기울이리라. 삶을 사랑하고 주어진 여건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평소 한 가족처럼 지내는 미시즈 강이 왔다. 할머니, 저하고 나가요. 누워 계시면 더 처져요. 무작정 차에 오르란다. 어디만큼 가다가 작은 몰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Pedicure shop 간판이 보였다. 얼떨결에 따라와 처음으로 발톱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홀이 넓고 일하는 사람도 여럿인데 손님이 많아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으니 피로가 싹 풀린다. 등의자가 시원하게 마사지해준다. 종아리도 손 마사지해준다. 발의 근육을 풀어줄 땐 미안함마저 들었다. 발이 못생겼는데 버젓이 내놓고 서비스받는다는 게 왠지 부끄러웠다. 내 발은 키에 비해 작고 볼이 넓어 예쁜 구두를 신어도 일주일이면 헌 나룻배처럼 된다. 젊었을 때 여름이면 샌들을 즐겨 신었는데 노출되는 발의 흠을 감추려고 발톱에 페디큐어를 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발톱을 칠했을 뿐인데 좀 나아 보이는 것 같았다.
발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동안 겨울의 우울 같은 날들을 보냈기에 봄 빛깔 핑크를 골랐다. 살갗이 희어서 핑크가 돋보인다고 띄워 주는 말이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1시간 30여 분 동안,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호강을 누렸다.
아르메니언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90이 다 되어 보인다. 허리가 꼬부라져 워커에 의지하며 걷는 모습이 힘에 부쳐 보인다. 거동이 불편해도 예쁘게 치장하고 싶은 여성 본능이 작용했을까. 다듬어지는 손톱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노인의 모습에서 얼핏 젊었을 때의 한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하얗고 예쁜 작은 손이 나이가 들었어도 곱다. 어느 신사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 놓고 왈츠를 추었음 직한 손이다. 발도 외씨버선에 딱 어울릴 것 같이 갸름하다. 허리가 너무 굽어져 정장 차림의 외출은 힘들 것 같으나 눈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곳에 정성을 기울여 즐기려는 것 같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 만은 청춘 아니겠는가. 편안한 자세로 몸을 맡기고 아름다움을 다듬어가는 노인이 행복해 보인다.
샌들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발톱에 자주 시선이 간다. 눈이 즐겁고 기분이 상쾌하다. 미시즈 강은 노모가 계시기에 나이 든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물처럼 바람처럼 만난 이웃, 아들만 있는 내게 다가와 딸 노릇 하고 자녀들까지 친손자, 손녀처럼 따르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미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생활에서 가끔은 일탈도 해 볼 일이다.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작은 것에서 활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 미시즈 강 배려로 축 처져 있던 기분이 산뜻하게 되었다.
꽃 물결 너머로 사라져 간 세월 속에서 다시 건져낸 봄. 몸도 마음도 핑크빛으로 출렁인다. 다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