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박남준(1957∼)

 

한창 일하고 있는데 눈이 많이 왔다. 내 직장은 학교고, 이 학교는 산에 있어 눈이 내리면 고약하다. 다들 걸어서라도 빠져나가라고 이야기한다. 남들이 바깥으로 향할 때 외투를 입고 더 안쪽으로 걸었다. “첫눈이 오면 너랑 나랑 여기서 만나자.” 이런 약속을 25년 전에 했었다. 내가 이 학교의 신입생이고 그 친구도 신입생이었을 때다. 첫눈이 오니까, 만나기로 했으니까, 약속한 장소에 갔다. 갈 때 주머니에 이 시를 넣고 갔다. 어느새 사람은 늙었고 약속만 남았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갔다고 핑계를 댈 참이다. 다만, 너무 추워서 오래는 못 있었다.

매일매일 읽어도 좋은 시가 있고, 쥐고 있다가 콕 꺼내 읽어야 좋은 시가 있다. 박남준의 시는 특별한 배경과 함께 읽을 때가 좋다. 이 시를 기억했다가 들녘에 눈 내릴 때, 광에서 홍시 꺼내 먹듯 꺼내어 읽자. 송송 가볍게 날리는 눈이 아니고 젖어서 무거운 눈이 내릴 때 읽자. 내가 보기엔 조금 늙고 겉보기에는 많이 늙었는데 마음은 하나도 안 늙은 것 같을 때 읽자. 지나간 청춘이 생각날 때, 바로 그때 읽자.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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