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예뻐서 데려온 애가 남천이었어요. 어디서나 잘 자란다고 하고. 한동네 살다가 이사간 금천이라는 애도 생각나고. 그래서 잘 키워보고 싶었죠. 생각날 때마다 창문 열어주면서 물 주면서

그랬는데 시들해요.

일조량이 부족했을까요. 금천이가 중학생이 되어 놀러왔을 때 엄마 뒤로 숨던 일이 생각납니다. 동네에 그애가 있다 생각하면 신나면서도 그랬어요. 그런 날들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중략)


키우던 애가 커서

키우는 마음이 뭔지 아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왜 자꾸 잊을까요. 얼른 가서 남천을 봐야겠어요.



―임승유(1973∼ )



‘남천’은 나무 이름이다. 햇볕에 강하고 추위도 잘 견딘다는, 실내에도 어울리고 울타리에 심어도 좋다는 남천나무 말이다. 그런데 그 나무를 못 봤어도 괜찮다. 우리 안에서 남천은 수만 개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남천 대신 다정한 눈동자를 떠올리리라. 식물을 키우는 이들은 자신의 식물을 연상하리라. 그리고 자식 키우는 부모는 남천의 이름 뒤에서 아이의 이름을 찾아내리라. 한 시인의 시가 독자 각자의 시로 읽힐 때 시는 작은 기적이 된다.

무엇을 키우든, 누구를 키우든, 사랑해서 키우든 키우다가 사랑하든, 수많은 남천의 양육자들은 똑같은 마음이다. “잘 키워보고 싶었죠.” 시에 나오는 바로 그 마음. 맞다. 정말 잘 키우 싶었고, 잘 키우고 싶다. 키우는 것은 고단한 일이지만 때로는 삶의 목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아가, 엄마는 정말 그랬단다. 얘야, 너를 키우는 마음은 정말 그랬단다. 우리는 근심하고 노력하고 애타면서 널 키웠단다. 이 마음을 먹고 모든 이의 남천들이 잘 자라주면 좋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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