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관한 명상 수첩 / 이외수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히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 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 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비는 뼈 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비 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