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 채만식
근일 품귀로, 이하 한갓 전설에 불과한 허물은 필자가 질 바 아니다.
명천(明川) 태가(太家)가 비로소 잡았대서 왈 명태(明太)요, 본명은 북어(北魚)요, 혹 입이 험한 사람은 원산(元山) 말뚝이라고도 칭한다.
수구장신(瘦軀長身), 피골이 상접, 한 삼 년 벽곡(僻穀)이라도 하고 온 친구의 형용이다.
배를 타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뺐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 일이다.
조선 십삼 도(道) 방방곡곡 명태 없는 곳이 없다. 아무리 궁벽한 산골이라도 구멍가게를 들여다보면 팔다 남은 한두 쾌는 하다못해 몇 마리라도 퀴퀴한 먼지와 더불어 한구석에 놓여 있다. 써 조선 땅 백성이 얼마나 명태를 흔케 먹는지 미루어 알리라. 참으로 조선 사람의 식탁에 오르는 것으로 명색이 어육(魚肉)이라 이름하는 것 가운데 명태만큼 만만한 것도 별반 없을 것이다. 굉장히 차리는 잔칫상에도 오르고 ,
"쯧, 고기는 해 무얼 허나! 그 명태나 한 마리 사다가……."
하는 쯤의 허술한 손님 대접의 밥상에도 오른다.
산 사람이 먹고 산 사람 대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經)읽는 경상(經床)에도 명태 세 마리는 반드시 오르고, 초상집에서 문간에다 차려 놓는 사잣밥상에도 짚신 세 켤레와 더불어 세 마리의 명태가 반드시 오른다(그런 걸 보면 귀신도 조선 귀신은 명태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어린 아들놈 처가 세배 보내면서 떡이야, 고기야, 장만하기 번폐스러우면 명태나 한 쾌 사다 괴나리봇짐 해 지워 보내기도 하고, 바깥양반이 출입했다 불시로 들어온 저녁 밥상에, 시아버님 제사 때 쓰려고 벽장 속에 매달아 두었던 명태 두 마리를 아낌없이 꺼내다가 국 끓이는 아낙도 종종 있다.
상갓집에 경촉(經燭)에다 명태 한 쾌 얼러 부조하기도 하고, 섣달 세밑에 듬씬 세찬을 가지고 들어온 소작인에게다 명태 한 쾌씩 들려 주어 보내는 후덕한 지주도 더러 있다. 명태란 그러고 보니 요샛날 케이크 한 상자, 과실 한 꾸러미 이상으로 이용이 편리한 물건이었던가 보다.
망치로 두드려 죽죽 찢어서 고추장이나 간장에 찍어, 막걸리 안주로는 덮을 게 없는 것이 명태다. 쪼개서 물에 불렸다 달걀을 씌워 제사상에 괴어 놓는 건 전라도 풍속, 서울서는 선술집에서 흔히 보는 바 찜이 상(上)가는 명태 요리일 것이다. 잘게 펴서 기름장에 무쳐 놓으면 명태 자반이요, 굵게 찢어서 달걀 풀고 국 끓이면 술국으로 일미다.
끝으로 군소리 한다.
사십 년 전인지 오십 년 전인지 북미로 이민 간 조선 사람 두 사람이 하루는 어디선지 어떻게 하다가 명태 세 마리가 생겼더란다. 오래 그리던 고토(故土)의 미각인지라 항용 생각기에는 세 마리의 명태를 천하 없는 귀한 음식인 듯이 보는 그 당장 먹어 치웠으려니 하겠지만, 부(否)! 두 사람은 그를 놓고 앉아 보기만 하더라고.
- <신시대> 1943년 1월 / <채만식 전집> (창작과비평사, 1989)에서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