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한하운(1920∼1975)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1920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한하운 시인은 건강하고, 부유하고, 사랑받는 아들었다. 풍족한 집안의 장남이었고 체격도 좋고 머리도 비상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받으며 공부도 많이 했다. 그렇게 전도양양했던 청년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치료법도 없고 걸린 것을 숨겨야 했던 그런 병이었다.
이후로 시인은 계속해서 잃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집안의 재산을 잃었고, 가족과 이별했다. 학업과 직장을 잃었고 미래를 잃었다. 손가락을 잃었고 발가락을 잃었고 눈썹을 잃었다. 그렇게 하나씩 떼어 보내고 나서 이 시인은 많이도 슬펐겠다. 하지만 그가 쓴 시는 퍽 담담하다. 담담할 뿐만 아니라 명품급 시가 많다.
한때 명동에서는 시를 파는 거지로 불렸고 남들 눈 피해가며 밤에만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는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삶’을 보면 그런 처량한 신세가 등장한다. 부호의 장남이었던 한 사나이가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장면이다. 하늘이며 세상은 변한 것 없는데 오직 자신만이 변하고 버려진 느낌을 받아 사나이의 마음은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는 지나가 버린 것이 모두 다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이 사나이의 내면은 거칠어지지 않고 여전히, 혹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렇게 시인은 홀로 절망과 병을 이겨냈다. 정말 강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