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 강현자
뭘 입지?
옷장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걸린 옷이 빼곡한데도 막상 입고 나가려면 입을 게 없다. 오늘 서울까지 다녀오려면 멋도 멋이지만 무엇보다 편한 복장이어야 한다. 며칠 전부터 고민 끝에 미리 정해두었던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박스형이라 불룩해진 뱃살을 가릴 수 있는 데다 헐렁해서 걸음걸이든 무엇이든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밋밋한 디자인은 분홍빛 장미 브로치로 포인트를 주면 된다. 게다가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면 구색이 맞겠지. 지난번 강의에 입고 나갔을 때 수강생들의 반응이 괜찮았으니 달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 상아색 망사 가방과 흰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시원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발이 불편할 리 없으니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
그럭저럭 공식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로 커피숍으로 몰려갔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둘러앉아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중이다. 여자들이 모이면 으레 화장이나 액세서리 아니면 의상으로 말문을 연다. 그야말로 공유할 수 있는 화제로 짧은 시간에 돌입하기가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맞은편에는 하이디가 앉았고 그 옆에 오드리가 앉았다. 내 오른쪽 옆에는 클라라가 앉았는데 이 테이블의 구성원에 내가 꼈다는 것이 애초에 오류였다는 것을 난 금세 깨닫고 말았다.
옆에 앉은 클라라는 검은색 투피스를 입었는데 공식 석상에서 잘 어울렸다. 감쪽같이 마술을 부린 듯 클라라의 풍성한 체구에도 검은색 디자인은 우아미를 발휘했다. 하이디가 먼저 클라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머, 그 옷 예쁘다. 위 좀 벗어봐요. 나도 한번 입어보게"
알프스에서 바구니를 끼고 꽃을 따다 방금 내려온 것 같은 하이디는 넓은 챙에 끈을 뒤로 묶은 베이지색 천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에 셔링이 들어간 카키색 원피스를 입었다.
하이디의 말에 짐짓 여유있는 표정으로 클라라는 엄청 싸게 산 옷이라며 자랑삼아 어깨만 살짝 드러내 뵌다. 오드리도 눈을 희번덕이며 "어머, 가볍고 편하겠네. 그 사이트 좀 알려줘 봐. 그 가격이면 공짜네 공짜. 이건 무조건 사야지"
막 피어오르는 흰 장미꽃잎처럼 굵은 셔링이 목선 위로 향한 블라우스에 초록 재킷을 입은 오드리는 핸드백을 팔짱에 끼고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어 단아했다.
턱을 약간 치켜든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의 자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외모에 공을 들이는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차려입은 모양새는 언제라도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지만 멋보다는 편리함을 우선하는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고 시큰둥할 뿐이다.
'이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하면 안 될까?'
바로 그때 오드리의 펀치가 한 방 날아들었다. "자기도 하나 사"
옆에 있던 하이디가 거든다."맞아, 현자 씨. 현자 씨는 자신의 얼굴을 너무 믿는 것 같아. 내가 선배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건데 오늘 그 옷은 정말 아니다. 그건 집에서 살림할 때 입는 옷이지. 그 옷은 집에서나 입어. 안 그래? 솔직히들 조언 좀 해줘 봐"
하이디의 말에 오드리와 클라라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옷은 집에서나 입어.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말이지 화장하고 귀걸이까지 한다고. 그럼 경비 아저씨도 깍듯이 인사를 하거든"
오드리의 말에 몇 년 전 삐까뻔쩍 중형 세단으로 차를 바꿨을 때가 생각났다. 지하 주차장에서 짐을 내리느라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남자가 도와주겠다며 성큼 다가왔다.
소형을 타던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큰 차를 타니 도로에서도 양보해주는 운전자가 많더니... 하물며 자동차도 그런데 옷까지 제대로 차려입으면 아마 남자들이 꼼짝 못 할걸? 힐끔힐끔 보내는 눈길을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도 부담이고 어쩌면 귀찮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 어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드리가 계속 말을 잇는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코르셋을 입고 나간다고"
'코르셋?'
순간, 앉아있는 나의 허릿살이 용암 흘러내리듯 흐물하게 내려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슬며시 아랫배에 힘을 주어보지만 그런다고 다시 올라붙을 살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핑계로 긴장감은 허릿살과 함께 늘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코르셋을 입어보겠다고 샀다가 이틀 만에 포기했던 일이 생각났다. 아래쪽부터 힘껏 끌어당겨 입으니 엉덩이도 올라가고 군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드러나는 S라인에 스스로 감탄하는데, 세상에나! 그 살들이 죄다 겨드랑이 밑으로 몰려 와 농성을 하고 있었다. 상체가 불룩한 로봇처럼 보여도 처음엔 참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쉬기도 버겁고 결국 한계를 느낀 나는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다시는 입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새까맣게 잊고 있던 바로 그 코르셋이 지금은 내 마음을 옥죄고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불어나는 살덩이를 감당할 길이 없다 했는데 어쩌면 저 코르셋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의기소침한 채 돌아오는 내내 그녀들과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들 성화에 못 이겨 주문한 투피스가 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그 옷을 입고 좀더 여성스러워진 자신을 상상하며 설레기까지 한다.
다행히 주문한 옷은 하루 만에 득달같이 달려왔다. 비닐 포장을 가위로 조심스레 뜯었다. 투명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는 낯선 색깔의 뭉치가 나를 더욱 달뜨게 한다. 종아리까지 오는 상아색 끈 원피스를 입고 숏 재킷을 덧입었다. 우아해진 나의 모습이 궁금해 마음이 먼저 안달이다. 거울 앞에 섰다.
"이건 아니지!"
깊게 파인 가슴은 목걸이로도 감당이 안 되었으며 상아색 롱 원피스는 볕에 그을린 피부를 더욱 검어 보이게 했다. 거울 속 아줌마의 파리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얹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하이디도 클라라도 오드리도 아닌 그냥 현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