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값 / 조이섭
사람 사는 게 하도 실미지근하여 세상이 와 이렇노, 했더니 동네 할머니께서 채소를 다듬던 손을 멈추지도 않고 한마디 툭 던진다.
“너만 잘하면 된다.”
공자께서도 제경공이 정사에 관해 묻자, 할머니와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임금은 임금 노릇, 신하는 신하 노릇,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자식은 자식 노릇을 잘하는 것입니다.”
호호백발 할머니가 삶의 체험에서 뱉은 달관의 한 마디와 제각각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잘하면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공자님 말씀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한마디로 꼴값하고 살라는 말씀 아니신가.
사물의 생김새 또는 처지나 형편을 얕잡아 이르는 말을 ‘꼴’이라 한다. 우리는 명함에 제 꼴을 새긴다. 자랑하고 싶고, 내세우고 싶어 안달하는 그 잘난 꼴 말이다. 블로그, 카페의 프로필에도 번지르르하고 시답잖은 꼴이 얼마나 많은가. 제멋에 겨워 그리 내놓고 자랑하는 거야 어쩌랴마는, 그랬으면 그 꼴값이나 제대로 해야 하는데 행동은 개차반이니 꼴불견이라 하고, 꼴사납다는 말이 생겨난 게다.
직위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이름이요 꼴이다. 직위가 높을수록 그에 대한 책임도 크다. 그런데 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일부 선생님을 보면 우습지도 않다. 남학생이 여선생님을 맞대 놓고 희롱하거나 학부모가 뺨을 때려도 먼 산만 쳐다본다. 해결과 처분은 고스란히 교육청에 미루고, 애먼 제도 탓만 한다. 그래 놓고 밖에 나가서는 요즘 교사들은 모두 제 위주다, 아래위를 모른다고 핏대를 올린다.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 꼴이 이래서야 어떻게 공교육이 바로 서겠는가.
직종이나 직분도 마찬가지다. 언론, 말로써 세상사 시시비비를 논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 좋은 말 뒤에 숨어 유체 이탈 화법으로 사사건건 비아냥거리거나 하나 마나 한 양비론을 늘어놓기 일쑤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알 권리’라는 말을 조자룡 긴 창 쓰듯 한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가십을 기자들이 헤집고 다니다 보니 세상의 등불을 밝히는 데 쓰라는 펜은 휴지통에 들어간 지 오래다. 직필(直筆), 정론(正論)의 사명도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격이다.
어찌 그뿐이랴. 농민은 농민만, 노동자는 노동자 입장만, 회사 사주(社主)는 자기 이익만, 의사는 의사 업종의 이익만 대변하고 주장한다. 이런 것 조정하고 해결하라고 뽑아 놓은 의원이란 사람들은 한몫 더 거든다. 국민이 뽑아 주었다는 걸 내세워 일은 뒷전이고, 무소불위의 단맛만 즐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표뿐이다. 나라보다는 당, 당보다는 공천만 머리에 꽉 차 있는 사람이 지도자 연하고 있으니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들 수 없다.
동(東)과 서(西)의 갈등이 조금 나아지나 했더니 수도권과 지방, 남과 여, 늙은이와 젊은이, 빈과 부, 좌와 우, 심지어 좋아하는 연예인을 두고도 패거리를 지어 삿대질에 여념이 없다. 이런 짓들의 잘잘못을 가려야 할 사법부마저 흔들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누가 봐도 권력의 입김이 닿은 심판, 정치성 짙은 판결을 바라보는 눈길이 고울 리 없다.
안보, 경제, 안전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나랏일이 없겠지만, 교육은 인간다운 인간을 키우는 기본이요, 언론과 사법은 험한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믿고 기댈 보루요 잣대이며 저울이다. 이 셋이야말로 ‘나라’라는 무쇠솥(三鼎: 삼정)을 받치는 기둥이라 생각하기에, 백면서생에 불과한 내가 외람되이 주마가편하는 심정으로 북을 두드려 본 것이다.
인생은 제 꼴 대로 사는 것이지만, 그 꼴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고정불변이 아니다. 세상은 격변하고, 꼴은 천변만화한다. 지금 잘나가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그렇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옳고 그름을 헤아리기 전에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만 따지다 보면, 한순간 허방을 짚어 버리거나 예기치 못한 고난에 빠질 수도 있다.
생각이 깊으면 실수가 줄고, 실수가 줄면 꼴값이 올라간다. 일상의 품격이 떨어지면 추해지고, 추해지면 끝 모르게 떨어진다. 모두가 하나밖에 없는 제 얼굴을 타고난다. 아무도 자신을 대신하지 못하는 만큼 저를 귀하게 여기되, 다른 사람도 존중하는 마음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꼴값을 올리는 지름길이다.
살기 좋은 세상은 제도나 법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세상에서 제대로 꼴값하고 살려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야 한다. 격물치지의 핵심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대학』은 격물치지를 한 사람만이 입지를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수신제가하고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위정자나 지도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덕목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을 읽는 중에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려운 내용을 만나면, 그 근본이 완벽하게 이해될 때까지 연구하고 사색하라고 타일렀다. 그에 비하면, 예전에 내가 공부했던 자세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요즘 들어 바꾸어 보려고 애써 보지만 만시지탄이라 아쉬움이 크다. 기억의 그물망이 헐렁해져서 금방금방 빠져나가니 말이다. 가는 세월은 붙잡을 수 없나 보다.
사람이 변변찮은 데다가 ‘꼴값’조차 못 하면, 소먹이 꼴(芻)만 못하게 될까 봐 눈만 뜨면 걱정이다. 한평생을 살고도 꼴망태에 허접쓰레기만 가득해서야 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