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달그락 / 최연실

 

부암동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고요가 내려앉은 동네, 골목마다 시간의 먼지가 덮여 있다. 길 끝에는 화첩 속의 한 장면처럼, 김환기 미술관이 들앉아있다. 희끗한 담장 위로 솔잎 그림자가 잔물결처럼 일렁이자. 이내 바람이 먼 기억을 뒤흔들었다.

수화 김환기 선생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향안 변동림 여사의 얼굴이 겹친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빛과 그림자처럼 그렇게.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던 그는,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늘 문학을 전공한 그녀와 함께였다. 그녀는 남편이 ‘예술가의 삶’을 살도록 지켜준 동반자였다. 언제나 하얀 벽 위에 걸린 그의 점화(點畵) 속엔 그녀의 애정이 숨어 있다. 그녀는 남편의 그림을 지키기 위해 생활을 꾸리고, 때로는 남편을 먼 곳으로 보내야 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젊은 날의 햇살을 따라 팔을 뻗었다. 오래전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정현주 작가의 에세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가 책장에 꽂혀있다. 책을 펼치자, 성북동 274-1번지에 둘의 집을 그린 그림이 나를 반겼다.

그들이 마련한 신혼집은 김용준의 노시산방이었다. 다섯 계단을 한달음에 오르니 고즈넉한 결을 따라 자연스레 갈라진 소박한 솟을대문이다. 대문 위로는 좁고 낮은 서까래가 살짝 덮여, 주변의 바람을 막아준다.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 돌담은, 낮은 처마와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처럼 중후한 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맞배지붕의 기와 끝단은 여염집 부인의 버선코처럼 살짝 말린 모양이다. 담벼락에 난 작은 창으로 온기가 서려든다. 그 창 너머로 밥을 짓고 있는 그녀를 그려본다.

그녀가 수북하게 담은 밥그릇에,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두레 반상에 소박하게 담긴 반찬도 두세 개, 올려놓는다. 밥상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대화의 강물이 여울진다.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둘은 눈빛으로 말을 이어간다. 그 새 수저와 그릇이 청아하게 부딪치며 달그락 달그락거린다.

젊은 날, 그들은 가진 게 없었다. 뒤뚱거리는 두레 반상에 밥그릇 두 개, 수저 두벌, 이불 한 채 그리고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전부였을 것이다. 겨울밤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들고, 여름이면 마당에 핀 봉선화를 바라보며 살지 않았을까. 아무리 늦어도 집에 오면 수화 선생은 저녁상을 원했다고 한다. 막막한 현실 속에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에서 위로와 희망을 보았기에 예술가의 가난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수화 선생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점화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문득 내 젊은 날의 향이 피어오른다.

침대 옆 탁자의 스탠드 불빛, 벽에 걸린 결혼사진은 내게는 가장 값진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의 신혼은 그들의 달그락거림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시어른과 함께 사는 집은, 사랑만으로 숨쉬기엔 공기 밀도가 높았다. 식탁 위에선 종종 웃음보다 의무가 먼저 오갔고, 부엌에서 나는 소리도 경쾌함보다는 조심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복기할수록 잊히지 않는 선명한 날이 있었다.

결혼 첫해 크리스마스에 남편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었다. 그 박스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전질이 들어 있었다. 무게는 단순히 종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남편이 나를 책 읽는 여자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책장을 넘길 때, 그 사각거리던 소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 내 신혼도 두 사람이 빚어내던 그 달그락거림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이제야 알 것 같다. 신혼이란 건 삶의 가장 단순한 자리에서 가장 풍요로운 마음을 누리는 시간이었음을, 달그락거림의 본질은 관계라는 것을…. 소리가 있다는 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 그릇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기억 속에 내가 있음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다. 그런 내 옆에서 남편은 거창하지 않은 외조 대신 되레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침묵을 보탠다. 같은 공간에서 남편과 내가 호흡을 고른다. 그게 나의 달그락 달그락거림이다.

산마루에 붉은빛이 골목에 스밀 즈음, 부암동 언덕을 내려온다. 골목길 담벼락 위로 주홍빛 외등이 걸리고, 집마다 노란 불빛이 내려 포근하다. 어디선가 저녁밥 짓는 냄새에 내 허기진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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