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뒷마당에는 무궁화 나무가 세 그루 있다. 빨강, 노랑, 흰색으로 각기 다른 색깔 꽃이 핀다. 새로운 가지를 내며 계속 피기 때문에 오래도록 꽃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이사 와서 묘목을 심었는데 십여 년이 지나니 제법 몸통이 굵어지고 많은 꽃을 피운다.
한국에서 보던 무궁화 꽃보다는 색이 다양하고 꽃 모양도 화려하다. 꽃은 여름이 한창이지만 여러 해 지켜보니 햇볕만 있으면 계절과 관계없이 시시때때로 피어난다. 이제 끝인가 싶을 때 잎 사이에서 새로 핀 붉은 꽃 한 송이 발견하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양 기쁘다.
무궁화는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꽃 모습과는 달리 은근하고 꾸준한 성정을 지닌듯하다. 피고 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하나가 지고 나면 다른 꽃으로 채워지고, 홀로 사랑을 소유하려고 다투지도 않아 늘 몇 송이씩 피어 있는 꽃을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변함없이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줄 믿음직한 충신 같다.
길을 지나다 남의 집 담장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았다. 꽃잎이 후두두 차창으로 날렸다. 흩날리는 꽃잎이 낭창낭창 안기는 가녀린 아가씨처럼 사랑스럽다. 분홍빛 분가루를 바르고 유혹하니 안 넘어갈 수가 없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무뚝뚝한 여인네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마음이 설레었다.
벚꽃은 다른 꽃에는 눈길조차 주지 말라고 화려하게 피어나 눈을 홀린다. 순하게 화장한 얼굴 뒤로 사랑을 독차지하고픈 뜨거운 욕망이 숨어 있는 꽃이다. 그래서 화산 터지듯 한꺼번에 생명을 터트려 온 천지를 덮는지도 모른다.
잎이 나기 전에 성급히 피어난 꽃은 짧은 생을 다하고 서둘러 떠나니 더 애틋하고 아쉽다. 누추함을 보이지 않으려 꽃잎이 시들기도 전에 우수수 떨어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찰나에 불과한 허무한 인생을 보는듯하다.
젊은 시절에는 벚꽃같이 화려하고 눈부신 사랑을 꿈꾼 적이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강렬한 사랑만이 사랑이라 착각했다. 무릇 사랑을 하려면 목숨 거는 사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객기를 부린 적도 있었다. 순간의 아름다움이 덧없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살아보니 뜨거운 열정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다. 온도 차가 다를 뿐 미지근한 사랑도 사랑이다. 너무 뜨겁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차지도 않게 적당히 따스한 온기를 오래 보듬을 수 있어서 좋다. 미지근함은 서로를 채워주고 맞춰주는 사랑이라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 은근한 사랑이 더 깊고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덤덤하고 미지근함에 익숙한 편이다. 비단 사랑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산다. 급하게 다가가지도 않고 떠날 때도 서서히 멀어진다. 데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온도가 나쁘지 않다. 미지근 하지만 따뜻한 쪽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한다.
모든 사랑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세월이 가르쳐 주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질긴 사랑이 있다. 열정만 넘쳐 종국에는 모두가 파멸하고 마는 서글픈 사랑도 있다. 미워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증의 관계도 있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남의 집 담장 안에는 벚꽃이 한창이고 우리 집 마당에는 무궁화 꽃 한 송이 피었다. 모두 다 사랑이다. 애첩 같은 벚꽃만 꽃이 아니라 조강지처 같은 무궁화 꽃도 꽃이다. 용광로 같은 사랑만 사랑이 아니라 모닥불 같은 사랑도 사랑이다.
<박연실 수필가>
뜨거운 사랑은 빨리 식고 서서히 달아 오르는 사랑은 오래 가겠죠. 미지근한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