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를 짊어진 사람 / 홍정현
‘한국산문 홈페이지에 소개된 수필 공모 당선작 제목이 잘못되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휴대전화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는 월간 『한국산문』의 홈페이지 관리자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이 틀렸다면 그건 내 불찰일 확률이 높았다.
‘또 실수했구나.’
그날은 아침부터 그랬다. 눈을 뜨면서부터 일주일 전의 일을 아직도 하지 않았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한국산문 유튜브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링크하고 강좌 교수들에게 메일로 전달하는 일이었다. 아침도 먹기 전에 부랴부랴 노트북을 켜고 일을 처리했다.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사과 문구도 메일에 넣어 보냈다. 얼마 전에는 부고에 발인 날짜를 잘못 올려 장례식장에서 휴대전화로 급하게 수정하기도 했다. 그 외 자잘한 오타 실수는 수시로 일어났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원래 좀 산만하고 실수가 잦은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 정도가 너무 심해졌다. 어떻게든 노력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단기 기억에 문제가 있는지 방금 본 텍스트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보고 또 보면서 여러 번 확인했지만 결국은 구멍이 생겼다. 마치 두더지 게임처럼 한 곳을 쳐서 집어넣으면 다른 곳이 뿅 올라왔는데, 그걸 보지 못해 사고가 생겼다.
또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자기혐오 비슷한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핑 돌았다. 요사이 작은 일에도 쉽게 눈물이 고였는데, 그때 밀려드는 감정에 매몰되면 더 심한 자기혐오가 덮쳤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이 모든 증상은 갱년기 장애 현상.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니 자기 연민은 그만, 우선 수습부터 해야 했다.
게시물을 확인했다. 2월에 등단하는 조성진 작가의 등단작 「쿠바를 떠나며 사랑을 알았네」가 「쿠바를 떠나며 사랑을 잃었네」로 적혀 있었다. 일단 사과가 먼저였다. 문자를 보낸 편집위원에게 죄송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작가에게도 꼭 전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게시물을 고쳤다. 홈페이지에 있는 것만 고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 내용을 보고 개인 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에 자료를 올리는 회원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방에도 정정 사실을 전해야 했다. 내 실수를 알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 잠시 마음을 다잡고 수정 사항을 전달했다.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내 블로그에도 들어가 등단작 이름을 고쳤다. ‘잃었네’에서 ‘알았네’로.
그런데 이런 수정 과정에서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전에는 오류를 발견하면 즉시 일을 시작해 뚝딱 고쳐 처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동안 ‘멍…’ 하게 노트북만 바라봐야 했다. 머릿속이 답답해지고, 가슴이 쿵쿵 뛰며, 속에서 열기둥이 발화되어 얼굴로 올라왔다. 뺨의 열감을 느끼며 그렇게 멀뚱하게 앉아 생각을 쥐어짜야만 했다.
‘빨리 고쳐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멍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낡은 컴퓨터에서 용량이 큰 프로그램을 열고 한참 동안 로딩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뇌 속이 젖은 스펀지로 가득 찬 듯 무겁고 어두웠다. 이런 현상을 브레인 포그(Brain Fog)라고 했다. 갱년기 여성 중 일부는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느낌이 지속되어 집중력 장애와 단기 기억 감소를 겪는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었다. 브레인 포그.
매일 ‘죄송하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일상은 우울했다. 나는 사과만 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열등한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조심할수록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반복되는 실수는 호르몬의 장난으로 심해진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더욱 가속했다. 나의 꽃 같은 오십 대를 이렇게 우울하게 자책만 하면서 보내야 할까? 그건 지옥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그냥 좀 ‘덜떨어진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일머리가 좋고 일 처리가 정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실수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작업의 순간마다 최선은 다하겠지만 잘못을 했다고 해서 스스로 자책의 늪으로 몰지 않으려 한다. 실수가 두려운 건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닐까? 이제 타인에게 모자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겁내지 않겠다.
덜떨어진 사람이 되는 건 솔직히 유쾌하지 않다. 아마도 매 순간 갈등할지도 모른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들어 또 자괴감의 동굴 속을 서성거릴 수 있다. 하지만 머리 안에 안개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웃을 방법은 이것뿐이다. “나는 브레인 포그, 좀 덜떨어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어찌하여 나는 ‘사랑을 알았네’를 ‘사랑을 잃었네’로 적었을까? 뇌과학적으로 봤을 때, 나의 뇌는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찌 할 말이 많아질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