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철학 / 임헌영
한바탕 목놓아 통곡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걸 참느라 끙끙댈 때가 적지 않다. 누군들 호모돌로리스(Homo Doloris)의 존재가 아닌가. 그럴 때면 나는 직업인 문학평론가답게 명문 속에 나타난 통곡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찾곤 하는데, 그중 으뜸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도강록〉이다.
‘7월 8일 갑신일. 날이 맑았다.’로 서두를 떼고는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 식사하고 길을 떠난 일행은 보이지도 않는 백탑(白塔)이 가깝다는 예고를 들으며 산기슭을 돌자 광야가 시선을 확 터주는 데서 그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한바탕 울 자리로구나!(號哭場 可以哭矣)”라고 선언하며 통곡의 인체생리학을 이렇게 풀어준다.
옛날부터 영웅은 잘 울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만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실 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 듯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찰 만한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거든!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다네. 까짓것 기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골이 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짓것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미우면 울 수 있고, 까짓것 하고 싶으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번 활짝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빠른 방법이 없네.
예로부터 철인이나 의사들이 웃음은 만복의 근원이라며 건강 증진에 최고의 보약이라고들 꼬드기지만 그건 인간의 복합구조적인 심층 심리를 꿰뚫지 못한 게 아닐까 한다. 웃음에 뒤지지 않게 울음 역시 트라우마의 명 치유법이자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것임을 연암은 필시 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울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欲)이 다 잘 풀어주기만 하면 엔돌핀이 샘솟듯 넘쳐날 것이다.
어찌 영웅과 미녀에게만 울 권리를 양도할 수 있겠는가! 나도 살아오면서 통곡하고 싶을 때가 있었으나 여태껏 한 번도 그러질 못했다. 통곡을 목소리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다리와 팔로는 땅을 벌주듯이 쿵쾅 짓밟으며 하늘을 저주하듯이 허공을 향해 성난 주먹을 휘두르고 온 몸통은 늙은 소나무처럼 뒤틀어대며, 얼굴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을 한껏 발산시켜 발광하듯이 천둥 치고 지진이 일 듯이 사자와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게 통곡의 종합예술일 터이다
그러나 아무리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내 집에서 벽에 못 하나만 박아도 항의를 받는 처지라 대체 어디서 그런 발광을 맘 놓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저런 잡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연암이 어찌 내 마음을 미리 알았던지 그렇게 통곡하기 좋은 장소를 삼빡하게 추천해준다.
이렇게 곡할 만한 장소로는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바다를 굽어보는 곳에 한바탕 통곡할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요, 장연의 금모래톱에 가서 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요, 오늘 요동벌에 다다라 이로부터 산해관까지 1천2백여 리 어간은 사면에 한 점 산도 볼 수 없고 하늘가와 땅끝은 풀로 붙인 듯, 한 줄로 기운 듯 비바람 천만 년이 이 속에서 창망할 뿐이니, 또 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야.”
-박지원, 리상호 옮김,《열하일기》상, 보리, 2004, 110-112, 원문은 572)
딱히 요동벌인지 만주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통곡을 하고팠던 한 사나이가 또 있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고 절규한 건 이육사다. 그가 목놓아 부른다는 건 눈물조차 메말라 붙어버린 통곡의 변형일시 분명하다. 그건 마치 소월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라는 절창에서 묻어나는 인간의 분노와 슬픔과 원한이 토해내는 최고단계의 숭고하고 웅위한 풍모일 것이다.
내가 세계 여행 중 발견한 통곡하기 좋은 벌판은 한두 곳이 아니다. 그중 러시아의 드넓은 밀밭 들판은 그냥 차를 세워두고 한나절 머무르며 발광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 벌판뿐이랴.
융프라우의 설경이 주는 적막에 하염없이 황홀경에 빠졌다가 불현듯 연암과 육사가 떠올랐다. 나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면 그 산정을 텅텅 비우게 한 뒤 혼자 남아 내 통곡 소리에 눈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목놓아 소리 지르고 싶어졌다. 연암이나 육사의 혼령이라도 온다면 내 비록 가난하지만 그곳에 갈 여비는 대줄 용의가 있다.
눈밭이라면 그 기개나 규모가 확 떨어지긴 하지만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도 한몫한다.
고교 시절 내 애창곡이었던 이 노래 중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촛불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대목에 필이 꽂혀 한바탕 울려고 눈 내린 밤에 몰래 뒷산 골짜기로 접어들자 겁이 나서 살그머니 잠자리로 되돌아왔던 부끄러운 사연이 숨겨진 대목이다.
통곡의 장소가 어디 그곳뿐이랴!
모하비사막도 추천할 만하다. 더 광활한 사막이 많지만 나는 모래밭이라고는 고작 그곳밖에 못 봤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언제부터 나 같은 초라한 존재가 기껏 우는 데 뭐가 그리 호들갑 떨며 멋진 곳만 거론하는 눈꼴 시린 족속으로 타락했느냐는 분노의 통곡이 내 귓전을 방망이질한다. 애간장을 태우며 창자가 끊어지듯 분노와 울분과 슬픔으로 당장이라도 울음판을 벌여야 할 판인데 언제 통곡의 자리를 찾아가느냐는 꾸짖음이 쏟아지는 듯 하다.
그래, 당장 내 슬픔이나 분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나 몰래 아내에게만 했던 곡절은 “니, 내가 서러버서 울고 싶을 때 어땠는지 아나? 밤중에 외양간으로 가 소 목 끌어안고 울었데이. 그라믄 소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 대가리로 내 뺨때기를 막 문질러준대이.”
아내가 이 사연을 내게 전해주면서 자신의 통곡의 비밀 아지트도 밝혔다.
“내가 억울하고 서러울 땐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몰래 화장실에서 물 틀어놓고 엉엉 울곤 했어요.”
아, 돌팔이인 내 글 나부랭이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엉뚱하게 남의 다리만 긁어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