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알림 톡이 뜬다. 서른 해도 훌쩍 넘긴 오래된 그릇과 찻잔, 다기를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렸더니 짧은 시간에 연락이 닿는다. 빈티지 레트로란 검색어로 등록된 오래 묵은 그릇들이 주인을 찾아 훌훌 떠날 것이다. 호텔 민예품점에서 당시에는 제법 준 청자와 백자를 올렸더니 금세 주인이 나타나 얼른 안아가며 왜 파느냐고 묻는다. 말의 뉘앙스는 왜 가치를 모르냐는 듯해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에게서 가치를 잃은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인지 가치를 몰라서 떠나보내는 것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보내는 것들이 더러는 있다.
여자에게 결혼은 공식적으로 허락된 사치의 극점이다. 가장, 최고라는 수식어를 가진 모든 것들을 소비하여도 누구 하나 함부로 야단치지 않는다. 주변의 공공연한 부추김과 암묵적인 허용이 있기에 결혼을 앞둔 여자는 대범해진다. 부모의 욕심과 체면까지 더해지면 기둥뿌리가 뽑힌다고 야단들이었던 시절,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돌며 얇은 지갑에 맞추어 한국도자기니 밀양도자기니 하는 그릇 세트를 사러 다녔다. 다만 욕심을 낸 크리스털 포도주잔과 위스키 잔들은 쨍한 맑은 소리를 냈지만 잔을 부딪칠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신혼의 그릇들은 할 일이 많았다. 기본이 6인용 10인용이었던 그릇들을 사서 신혼생활을 하며 백일이니 돌이니 집들이니 손님들의 치다꺼리를 야단스레 해냈다. 신혼의 단물들이 미처 빠지기도 전에 조심해도 금가고 이빨이 빠지는 그릇들처럼 마음을 다치는 일들이 무시로 생겨났다. 사람들이 내게 준 상처들도 있었지만, 그릇들끼리 부닥쳐 깨어지듯 낯선 것들 속의 혼자만의 부대낌에 생 속을 앓았던 날도 적지 않았다.
아끼는 그릇들은 쉬이 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실금이 간 그릇일지라도 꽃을 담아 수반처럼 쓰기도 하고 화분 받침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어떡하든 수명을 연장하려 심폐소생술을 했다.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도 그랬다. 둘째를 잃고 까무룩히 꺼져가는 나를 잡고 당신 탓이 아니라며 딴생각 말라며 곁에선 위로하던 그에게 당신이 무슨 잘못을 하든 한번은 용서하리라 속으로 맹세를 했던 날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흘렀고 십여 년이 훌쩍 견디었다. 그동안 짝을 잃은 그릇들은 '깨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선전 문구의 코렐 그릇으로 바뀌었다. 깨어지지 않는다는 그릇도 잘도 깨뜨리던 여자는 그렇게 중년의 여자가 되었고 오래 묵은 그릇처럼 촌스러워졌다.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사람 빼고는 모두를 바꾸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저울질하다가 그릇들을 바꾸고 냄비 세트로 새로 들였다. 자신이 이제 피어나는 꽃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중년의 여자는 카톡 사진에도 그릇에도 옷에도 온갖 꽃을 담는다 했던가. 스무 해 마음을 주던 제품을 고가의 세트로 갖게 되었다. 사고 나서 보니 드라마나 유튜브 먹방채널에 걸핏하면 나오는 흔하디흔한 그릇이 되어있었다. 몇몇 친구를 초대해 밥을 차리는데 한물간 그릇을 이제야 샀다고 놀리는 바람에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한참 웃었다. 항상 머뭇거리고 재다가 막차를 탄 꼴이니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릇장만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사 살아가는 모든 것에 주저했던 모습이 드러나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씁쓸한 마음을 녹여내었다.
가끔 엄마의 장식장을 그려본다. 오래 묵은 엄마의 그릇들과 내가 가져다준 그릇들, 사은품 반찬통이 뒤섞여 있다. 엄마 밥이 그립다고 기별하는 날이면 엄마의 목소리조차 허기를 느끼게 한다. 현관문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뜸을 들이는 쌀밥의 냄새는 기름지다. 싫증 나 선심 쓰듯 가져다 둔, 내가 쓰던 그릇들과 엄마의 그릇이 나름 제 역할을 한다. 갓 지은 뜨거운 공깃밥, 방금 끓여낸 소고기 뭇국 한 사발, 자작한 국물이 일품인 삼색 나물 접시가 소복하다. 알맞게 익은 배추김치를 보시기에 담고 들기름 살살 바른 김을 접시에 담아 간장 종지와 내어놓는 정성만으로 충분하지만 준비해간 고기와 채소까지 곁들이면 상이 넘쳐난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적시면 쌓였던 고단하고 억울했던 일들이 녹진해져 누구라도 품어 안고 용서할 것만 같다. 손님상에만 오르는 황금 테를 두른 밥공기, 국 사발에 금빛 수저로 밥을 먹고 온 날은 흙수저였던 자신도 금수저가 된듯해 걷는 걸음걸음이 어기적거린다.
가끔 사람의 품을 그릇에 비유한다. 사람이 종지만 하다, 그 사람은 그릇이 넓다, 더 주려 해도 딱 제 그릇 만큼밖에 못 담는다는 말 하곤 한다. 옹졸한 성격을 종지만 하다 할 수도 소심해서 큰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종지만 하다 할 수 있을 것이고 대범하고 대찬 성격이나 인품이 너그러운 사람을 큰 대접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접만 한 자신인 줄 알았는데 종지만도 못함을 발견하는 날이 더러 있다. 그런 날이면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만의 역할이 있고 큰 그릇은 큰 그릇만의 쓰임이 있다고 애써 강조해보지만 작아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맘에 들지 않는 그릇이야 바꾸면 그만이지만 어디 온전한 구석이 없는 볼품없는 마음 품을 어찌해야 좋은 것인지.
처음 사 온 그릇들은 물에 불려 스티커를 제거한다. 스펀지로 거품을 일으켜 살살 닦아내면 꽃들이 막 피어난 듯 물기 가득 머금는다. 마른행주로 훔쳐내면 뽀독한 소리가 경쾌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한때 우리는 모두 새 그릇처럼 미래의 쓰임이 궁금했고 달콤한 인생을 꿈꾸었다. 좋은 사람과 풍성한 저녁을 기대하듯 소소한 설렘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급스러운 음식만 담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맵고 짠 음식, 뜨겁고 차가운 음식, 거칠고 기름진 음식을 가려 담을 수 없다. 살다보면 가끔은 프라이팬과 뒤섞어 기름때를 덧칠하듯 타인의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차가운 유리컵에 뜨거운 물을 부은 듯 쩍하고 갈라지는 가슴 터지는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게 삶이고 인생임을 뒤늦게 배운다.
당근! 알림음이 뜬다. 이미 늦어버렸나 보다. 푸르렀던 시절의 기억들은 간직하고 그릇은 보내야 한다. 테두리 도금이 벗겨진 찻잔에도 안녕을 고한다. 이제 누군가의 식탁에 놓여 또 다른 한 사람의 어느 시절, 한순간을 담아내는 첫 인연을 시작하겠지. 그 사람의 저녁이 평화롭기를 바라며 깨어지지 않게 포장을 한다. 주섬주섬 추억마저 따라나서려 한다. 애써 돌려세운 그때 여자의 젊은 얼굴이 포장지 속에 함께 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