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꽃 / 도월화
우리 엄마 무덤가에 핀 목화꽃
그 꽃 한줌 꺾어다가 이불 지었소
누나야 시집갈 때 지고나 가소
아롱다롱 목화이불 지고나 가소
일제초기 구전민요였다는 한중가閑中歌의 일부분이다. 가수 서유석과 이연실이 가사는 조금씩 다르지만 '고향꿈'이라는 제목으로 개사를 해서 부르기도 했다. 급속한 도시화로 요즘은 목화 보기도 어려워졌다. 얼마 전 한 전철 역사驛舍를 지나다가 화분에 심어놓은 그 꽃을 보았다. 아주 어릴 때 보고 몇 십 년 만이라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목단꽃처럼 화사하지도 않은 소박한 꽃이다. 매색 세모시로 무궁화를 접어놓았다고나 할까.
목화꽃을 보고 있으려니 내 가슴속으로 은하수인지 강물인지 그 무엇인가 찌르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매색 세모시로 단아하게 차리고 나선 큰고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마음속에서 목화꽃으로 피어나는 큰 고모 생각에 마음이 한편이 젖어든다. '하이고 아치라버라'라는 경상도 방언을 입에 달고 사셨던 분이다. 그 사투리말은 측은지심의 발로에서 나온 말이다. 누가 불쌍하고 가여울 때 쓰신 말인데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절절한 사랑이 어리어 있었다.
아침마다 큰 고모는 내 머리를 빗겨 주었다.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라고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묶어주어, 마치 명랑 만화에 나오는 아이 같은 우스운 모양새로 고모의 모시 치마꼬리를 잡고 나들이했다. 동네에서 솜씨 좋기로 이름난 고모가 모시 한복을 잘 손질하여 입고 나서면 40대 초반의 나이에도 고왔다. 가운데 가르마를 내어 정갈히 뒤로 쪽 지어 비녀 꽂으면 반듯한 이마에 코가 오뚝하고 쌍꺼풀이 예쁘게 진 눈에 갸름한 얼굴이 지금 생각해 보면 미인형 얼굴이다. 다섯 고모 중에 제일 맵시와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다. 5일 장에서 큰 고모가 사주었던 에메랄드 빛 브로치 생각이 난다. 고모가 에메랄드 빛처럼 화사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기억에 없다. 늘 모시나 흰 무명 같은 무채색 옷만 입었다.
고모는 열일곱에 스무 살 신랑과 혼례를 올렸다. 옛날에는 신부집에서 예식을 하고 며칠 묵은 후 색시가 시댁에 들어가는 신행 날짜를 받아두고 신랑 혼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 신행 기간에 그만 새신랑이 전염병에 걸렸다. 신랑이 위독하자 연락을 보내와서 큰 고모는 병상의 새신랑을 보러 갔다고 한다. 어른들이 신랑 입에 물이라도 한 수저 떠 넣으라고 시켜서 그리했지만 철부지 새색시는 도무지 어리둥절할 뿐 그냥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더란다. 새신랑은 푸르른 나이에 그 길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다.
큰 고모는 친정에서 아들 하나와 나에게 정을 쏟으며 지냈다. 딱 한 번 고모가 오빠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사람들이 다 잠든 밤 잠결에서였는데 오빠는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그때는 다시 잠들었다가 그 일을 잊어버렸다.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 때일까. 어쩌다가 고모에게 그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 왜 하필 한밤중에 회초리를 들었느냐고.
"그건 네 오래비가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서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그런 거란다."
"그럼 오빠가…"
"그래 네 오빠는 내 시숙 소생인데 양자를 삼았단다. 그래서 꼭 회초리를 들어야 할 일이 있어도 이웃에서 오해를 할까 봐 함부로 그러지를 못했지."
내가 결혼한 후 막내 고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큰고모는 결혼식만 했지 실제로는 처녀이셨단다. 훗날 양자로 들인 그 오빠가 결혼하자 큰고모는 할아버지 집 옆 공터에 새 집을 지어 분가를 했다. 손자만 셋을 두었고 손자들에게도 나를 키울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해 아들 며느리 손자의 존경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으로 '아치라버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자기 자신보다는 남을 위주로 살다 돌아가신지 어언 20년이 되어간다. 당시의 유교적인 풍습으로 할아버지도 당사자인 고모도 재혼을 염두에 두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옛 풍속이 꼭 좋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가며 한 평생을 그 시대인으로서 조화로운 삶을 일구어냈다는 것이 장하다고 생각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어린 내가 5리쯤 떨어진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가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큰고모가 매일 업어서 데려다주었다. 훗날 고모는 내가 얌전히 업혀서 잠자코 가다가 학교 근처에만 가면 창피하다고 얼른 내려 달라고 채근했다는 말을 하며 웃고는 했다. 큰고모가 매일 예습 복습을 규칙적으로 시켜주었기 때문에 나는 과보호로 어리숙한데 비해서 시험 점수는 거의 백 점을 받아서 어른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야 고모처럼 한결같이 예습 복습 지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시절엔 요즘처럼 간식거리가 없으니까 고모는 밀가루 단지에 엿을 담아 가구 위에 얹어두고 꼭 한 개씩 꺼내주었다. 절도가 있으면서도 인정이 많은 큰고모는 멀리서 오랜만에 친척이나 고모의 시댁에서 누가 찾아오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반기고 가실 때는 눈물로 환송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친 겨울에 나는 고모와 작별하고 할아버지 댁에서 대구의 부모님 계시는 곳으로 옮겨 전학했다. 그 후로도 방학 때마다 시골 가서 고모와 지냈는데 방학이 끝나면 큰고모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큰고모의 그 모습을 아련히 회상해 보면 어김없이 한 송이 소박한 목화꽃이다. 헌신적이 삶이 몸에 밴 목화꽃 사랑 어린 꽃이 8월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9월까지 피고 지며 10월이 되면 그 사랑의 열매가 익어 터지면서 씨앗을 싸고 있는 따뜻한 솜털을 만들어 낸다. 면직물이나 솜으로 만드는 것 외에도 종자에서 기름을 짜서 면실유를 만들고 마가린 비누의 원료로도 이용되며 한방에서는 종피를 벗긴 種仁을 강장 지혈 소종消腫등에 처방하고 뿌리는 통경通經등에 약용하는 것처럼.
요즘 고학력 여성들이 학교라고는 다닌 적이 없는 옛 여인들의 덕성과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개인주의의 팽배로 인한 봉사정신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서울의 어느 대학 여학생들의 설문조사에서 외모가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압도적으로 많이 했다는 신문기사가 났었다. 요즘 여성들은 목화보다는 장미꽃이 되기를 바라고 너도나도 장미 흉내를 내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큰고모를 추억하며 사람들 눈을 끌려고 하지 않고 겸손하고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하는 조용한 목화꽃에서 화려한 장미보다도 더욱 고결하고 그윽한 향기를 느낀다. 서유석이 부르는 '고향꿈'을 들으며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목화꽃을 본다. 문득 칠십 평생을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목화송이로 피어나 준 큰 고모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언제까지나 남은 이들 가슴속에서 포근한 목화로 피어나고 싶은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