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언어학 / 신재기
올 연초에 왼쪽 다리를 다쳐 달포 가량 심한 고생을 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인조석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헛디디고 말았다. 다리 높이는 50cm가 넘었다. 왼발이 빠지면서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왼쪽 무릎 주위에 타박상을 입었다. 금방 내 힘으로 일어서긴 했다. 일어나는 순간 아프다는 느낌보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잘 다듬은 인조석으로 반듯하게 놓인 징검다리는 어린아이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데, 멀쩡한 어른이 대낮에 넘어져 물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으랴. 다치고 물에 빠진 다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는지 주위를 살피면서 앞서가던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내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자고 몇 번이나 권했다. 괜찮다며 이를 극구 거부하고 5km가 넘는 거리를 한 시간 이상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다친 다리의 통증이 강하게 느껴졌다. 저녁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을 핑계로 병원은 다음날에 가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다친 부위가 붓고 걷기도 매우 불편했다. 서둘러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온열 찜질을 자주 하라며 일주일 분의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뼈에 손상이 없어 깁스를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소간 평정심을 회복했다. 이러한 평정과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강도를 더해 갔다. 진통제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진통제 복용으로 속까지 쓰려 고통이 가중되었다. 통증이 내 모든 의식을 불러 모아놓고 일장 훈계를 하는 듯했다. 일상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났으나 통증은 한층 더 심술을 부렸다. 통증이란 놈이 마침내 얼굴을 분명히 드러내고 내 몸을 점령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해 온 것이다. 마치 그간 내 몸 어디엔가 잠복해 있다가 호기를 만나 총공세를 퍼붓는 것 같았다. 왼쪽 다리 곳곳에 거무죽죽한 멍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폐허의 전장(戰場) 같은 멍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게릴라전을 펼쳤다. 우선 내 잠을 앗아가 버렸다. 진통제를 복용하거나 찜질로 그 도발에 대항해 보았으나 한 시간의 잠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놈은 금방 방어선을 뚫고 사정없이 공격해왔다. 순간의 얕은 잠마저 용납하지 않고 살을 도려내고 뼈마디를 부서뜨리는 듯한 아픔의 도가니에 나를 사정없이 몰아넣었다. 앉거나 눕거나 서거나 엎드리는 등 어떤 자세를 취해도 소용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온몸은 녹초가 되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갔다. 모든 욕망이 사그라지고 신경질만 가시처럼 돋아나는 나날을 보냈다.
강도가 더해 갈수록 이 통증에 관한 일상의 언어들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알게 되었다. 의사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어떻게 아프냐고 물었을 때, 내 통증을 표현할 마땅한 언어를 찾기가 어려웠다. ‘아프다, 쑤신다, 통증이 심하다’고 말하거나 이런 단어 앞에 ‘너무(너무너무), 아주, 엄청, 정말’ 등의 정도부사를 끌어오는 것, 끝에 가서는 ‘죽겠다, 잠을 한숨도 못 잤다’로 맺는 것이 고작이었다. 만난 의사들은 내 말을 몇 마디만 듣고 귀를 막았다. 그들에게서 환자 개인의 아픔에 대한 이해나 공감은 멀리 있었다. 축적된 일반적 경험치를 기준으로 진료하면 그만이다. 의사의 치료는 환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하나의 알고리즘에 불과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가 통증으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엑스레이를 찍어봤느냐, 뼈에는 이상이 없느냐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기 경험을 앞세워 각양각색의 처방전을 쏟아놓거나 지침을 하달했다. 그들 앞에서 나의 통증은 소외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기 위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밤잠을 설치면서 가까이 있는 아내를 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마침내 아내를 다른 공간으로 밀어내었다. 아내가 나의 통증과 관련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좀 차도가 있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드물게 오는 안부전화에서 자식들이 뱉는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좀 낫느냐, 병원에는 갔다 왔느냐의 수준에 머물렀다. 어떤 지인은 나를 두고 너무 예민하다고 했다. 내가 어른답게 진득하지 못하고 통증을 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나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고, 다른 사람 또한 내 아픔을 이해하는 데 인색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아픔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언어가 얼마나 빈곤하며, 상대를 위로하는 언어 운용이 너무나 서툴다는 점을 통감했다. 아무리 애써도 내 통증의 언어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나의 아픔에 관해 입을 다물었다. 아서 프랭크는 『아픈 몸을 살다』에서 “통증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는 용어는 없다. 통증을 표현할 수 없기에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할 말이 없다고 믿게 된다. 입을 다물게 되면서 아픈 사람은 통증 속에 고립되며, 고립은 통증을 악화시킨다.”라고 하였다. 나도 그랬다.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통증을 신으로 모시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내 과오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날 낮술을 한잔했다는 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앞을 살피지 않고 먼 산을 보았다는 점, 곧장 병원에 가지 않고 한 시간 이상이나 걸었다는 점,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고 치료에 온 힘을 쏟지 않았다는 점 등이 통증의 노여움을 불러왔다고 자책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통증의 실체와 얼굴을 인정할수록 고통은 더해지기만 했다. 어느 순간이었다. 이 통증은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나와 다른 실체가 아니라 내 몸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과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 자세를 고쳐먹었다. 조금씩 일상을 공유하는 존재로 가까이 두면서 다독여갔다. 한방치료도 받고 가능한 민간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로부터 내 고통에 관해 위로나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오롯이 내 몸의 일로만 여기며 통증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달포 동안 맞서거니 어르거니 하면서 곁에 두었던 통증이 어느 순간 성질을 죽이면서 퇴각하고, 나는 겨우 일상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얼굴을 감추기는 했으나 마음으로 전이되어 내 의식 한구석에 공포와 외로움으로 잠복하고 있다. 기회만 주어지면 이 우울한 통증은 수시로 고개를 쳐들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여기다가 내 존재를 지워버리는 마지막 통증도 남아있지 않은가. 머잖아 찾아오리라. 누구나 자신의 통증과 그 고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누구와 나눌 수도 없다. 통증의 언어는 전적으로 내 안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이다. 내 몸의 통증은 오롯이 나 자신의 몫이다. 이처럼 언어의 기본을 위반하는 것이 통증 언어학인가 보다. 그런데도 나는 또 징검다리에서 넘어지고 내 상처보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살피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