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미사에 남편을 봉헌하고 오는 길이었다. 산길에 무리 지어 피어나는 들꽃이 축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찔레 넝쿨 옆을 지날 때였다. 구절초 한 송이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꽃잎을 올리는 모습이 남편의 생애 같아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미역 솥에 불을 올렸다. 식탁에 둥근 리넨 레이스 보를 깔고 크리스털 꽃병에 꺾어 온 들꽃을 꽂았다. 그릇장에서 제일 예쁜 그릇을 꺼내어 찰밥과 잡채, 불고기를 담고, 그가 좋아하는 낙지 연포탕은 전골냄비에 담아 가운데에 놓았다. 마지막으로 화장을 하고 전날 밤에 손질해 둔 한복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얼굴이 저고리 고름처럼 발그레했다.
음력 8월 24일, 남편의 생일 아침이었다. 잊고 지나치기를 여러 번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추석 때문이었다. 맏며느리로 살아오는 내내 추석만 되면 두어 달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차례 음식을 만들고 일가친척을 맞는 일이 힘에 부쳤다. 힘껏 명절을 치르고 나면 일주 남짓 후에 오는 남편 생일은 대충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호탕해 했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은퇴를 하고부터는 기어이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그때마다 “당신이 애기냐?”며 놀려댔지만, 나도 그 속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들이 결혼한 첫해, 두어 달 뒤가 아들 생일이었다. 생일 전날이면 밤늦도록 준비하던 생일상을 이제는 내가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홀가분하면서도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건밤을 보내다가 한밤중에 부엌으로 나오고 말았다. 냉동고를 뒤져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 한 마리를 구웠다. 아침을 먹다가 남편의 생일을 또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혹, 아침 밥상이 아들의 생일상이라는 것을 알면 어쩌나 싶어 미안했다. 그래 단단히 마음먹은 일이 있었다.
올해는 달력을 받자마자 남편 생일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쳐 두었다. 양력으로 헤아려보니 10월 13일이었다. 예년 같으면 구월에 드는 생일이 윤달 탓에 시월에 있었다. 문득 생일을 올해의 양력 날짜로 고정하고 싶어졌다. 시월이라면 추수를 끝내고 곳간이 가득 찬 때가 아닌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더 바랄 게 없겠다. 남편의 남은 생도 그렇게 여유로웠으면 얼마나 좋으랴.
남편이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데에는 생월도 한몫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정칠월 동동팔월이라고, 벼 심어놓고 물꼬만 보러 다니며 어정어정 지내는 칠월에 태어났더라면 오죽 좋을까 싶었다. 그 여유로운 날 다 보내고 가을걷이로 발걸음 동동거리며 지난다는 팔월, 그도 모자라 복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라니…. 남편을 생각하면 수레에 나락 가마니를 깝북 싣고 아직은 볕 뜨거운 가풀막을 후들거리며 올라가는 한 마리 말이 떠오르곤 했다.
남편은 중학교 때부터 가족의 짐을 지고 살아왔다.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등짐은 장남에게로 옮겨졌고, 그 후로는 음력 팔월 이십사일 즈음의 짐말처럼 한 번도 등에서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말띠로 태어났지만 참없이 시원히 내달려본 적도 없었다. 달리다 서기를 반복하며 온 길이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온 가족의 기대를 안고 선택한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진로를 바꿔야 했다. 꿈을 이어가기에는 당장의 생계가 급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서는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는 동안 소신과 현실 사이에서 수없는 고비를 넘겨야 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고 수모를 참아 내며 정년을 채운 것도 여덟 식구의 밥을 지켜내야 한다는 일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늘 식구들 뒷전에 있었다.
생일이랬자 아이들 일정에 맞추어 주말에 외식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올해도 그럴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라도 제날에 챙겨주고 싶었다. 기억하기 쉽게 양력으로 바꿀까 했던 생각도 접었다.
며칠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색 도화지에 생화를 꽂아 꽃 카드도 만들고, 두어 구절 쑥스러운 고백도 담았다. 부쩍 추위를 타는 것 같아 신상품으로 카디건도 하나 사서 포장해 두었다. ‘현금 봉투도 만들면 어떨까?’ 웃음이 나왔지만 좀 유치하면 어떠랴, 이벤트로 하고 싶었다. 은행에 가서 신권으로 바꿔 제법 두둑하게 봉투를 만들어 두고 나니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생일을 기다리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설레었다.
연극배우가 된 것 같았다. 인생은 연극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이 오래고 힘든 시간을 용감한 척, 때로는 무심한 척 건너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가족 몰래 해야 했던 연극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일 년에 하루만이라도 그를 위해 지고지순한 아낙을 연기하며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 부부에게는 달콤한 신혼의 기억이 없다. 결혼 첫날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중병을 앓던 시부모님과 두 시동생과 함께 사느라 단둘이 겸상하여 밥을 먹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손아래 동서들이 신행에서 돌아와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차렸을 때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어느새 우리도 둘뿐이다. 미혼인 딸애가 있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여겼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둘만으로 채우고 싶었던 시간 앞에 와 있다.
촛불을 댕겼다. 혼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겸연쩍기 짝이 없었다. 자꾸만 목청을 돋우어보지만 금세 잠겨버렸다. 남편도 쑥스러운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촛불이 그의 눈가를 비추었다. 날카롭던 눈매는 늘어진 눈꺼풀 속으로 사라지고, 그윽해진 세월이 눈자위를 덮고 있었다. 꽃병에 꽂힌 구절초도 눈을 감는 듯했다.
나도 눈을 감았다. 노랫소리가 아득해지며 수많은 시간을 뛰어 넘어가고 있었다. 눈을 뜨면 푸르디푸른 날의 그가 내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