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길 위에서 / 김애자
저녁시간이다. 해종일 태양의 열기로 달구어진 아파트 벽체가 뜨겁다. 에어컨도 지쳐 더운 바람을 내뿜는다. 리모컨으로 작동을 멈추고 창문을 죄다 열어젖혔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후끈 달려와 살갗에 달라붙는다.
여름은 지루하다. 특히 나이 든 시니어들에게 여름은 더위를 피해 나갈 곳조차 마땅찮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늙은 모습이 부끄러워 소매 짧은 옷 입기를 꺼려 할 뿐만 아니라 행동도 굼떠 자발적으로 사회란 공동체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게 된다. 격리된 공간에 고여 있는 침묵과 공백이 여름철엔 버겁고 권태롭다.
며칠 전이다. 통장을 다시 만들기 위해 농협에 들렸다. 새로 만든 통장을 내주며 담당 직원이 암보험을 들라고 권했다. 20년 전에 들었던 보험이 만기가 되어 지금 가입하지 않으면 5개월 후엔 암보험도 들 수 없다며 은근슬쩍 바람을 넣는다. 농협에선 만 78세가 넘으면 암 보험은 물론 건강에 관한 어떤 보험도 가입할 수가 없다. 나는 직원에게 미안하지만 암이 발생하면 치료를 받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몇 해 전, 남편과 암이 발생하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뜻을 맞추었고, <사전의료지향서>도 받아 놓았다. 또 죽은 후엔 부의금을 받지 않도록 장례비로 깔축없이 준비해 두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들은 가능한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한다. 이건 생존의 본능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역동적이던 몸체가 점차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바다를 항해하던 뇌 역시 퇴화되어 어제 한 일을 기억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터에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건 가당찮은 욕심이다.
해 질 녘이면 아파트 단지 안에 만들어 놓은 오솔길로 산책을 나선다. 비교적 외진 곳이라 매번 새들의 놀이를 방해하게 된다. 오늘도 직박구리 일가와 마주쳤다. 필경 날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어미가 새끼들에게 나는 연습을 시키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새끼 다섯 마리가 땅에서 종종걸음을 치다가 조금 높은 가지에서 뭐라고 지저귀는 어미 소리를 듣고 폴짝 낮은 가지로 날아오른다. 갑작스럽게 침입자가 된 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낮추었지만, 어미는 본능적으로 인기척을 느끼고 새끼들에게 황급하게 뭐라 부르짖자 새끼들은 일제히 촘촘하게 밀집된 나뭇잎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커가는 생명들의 몸짓은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며 날개 죽지에 힘을 기르는 직박구리 새끼들도 사랑스럽고, 지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을 아이들도 사랑스럽다. 엄마가 끄는 유모차 안에서 곤히 잠든 아기들은 더욱 사랑스럽다. 키보드와 자전거를 타고 신바람 나게 내달리는 사내아이들의 싱싱한 몸놀림에는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 젊은 남자와 여자의 DNA 가지선에서 태어난 저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커가는 모습만 보인다. 성장의 속도만 보이는 아이들을 향해 누가 죽음도 함께 자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여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이렇게 설하였다.
“어린아이인 채로 살아라. 돌이 되어 바람이 되어 물이 되어 그 속에서 놀아라. 그것이 만물의 시詩이며 끝없는 길이다.”
장자가 설한 대로 자연은 천진하고 그냥 흐를 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 성장의 정점에 이르고 나면 서서히 노화되어 마침내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은 시시포스의 바윗덩어리를 기꺼이 끌어안는다. 그렇지 않고 천진한 아이인 채로 살아간다면 그건 직무유기다. 가정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고 사회 일원으로 감당할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장자가 제물론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인 채로 돌이 되고 바람이 되고 물이’ 되어 놀려면 적어도 암보험에 들 수 없는 내 나이 정도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암보험을 들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어도, 감성은 이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생태적으로 세포가 노쇠하여 이방적인 존재로 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란 걸 인정하면서도 부정적인 소인을 지니고 있어서다. 적당히 세상만사 그러려니 덮어 놓고 바람처럼 설렁설렁 놀이 삼다 죽자고 이성이 타이르지만 감성은 언젠가부터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어버렸다. 15층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서른네 평의 공간에서 굴곡 없이 가지런한 일상은 지극히 평화로운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감성은 외롭고 섭섭한게 많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할 땐 구미에 당길 음식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고 구시렁거린다. 무릎이 부어 병원엘 가면 의사가 노인들을 건성으로 대한다고 서운해하고, 거실 소파에서 밤늦도록 몽한 눈길로 티브이를 보는 남편의 야윈 등을 보는 것도 서글퍼한다.
하여 달이 높이 뜬 밤중이거나, 밤비가 줄기차게 내릴 때면 회한이 불면과 손을 잡고 괴롭힌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몸을 웅크리고 모로 누워 베개 깃을 적시는 흐느낌을 세상은 모른다. 한 인간의 슬픔을 모르는 세상은 가닿을 수 없는 멀고도 아득한 섬이다.
불면으로 지쳐 깜박 잠들었다 깨어나면 새로운 시간이 기다린다. 시의 첫 줄처럼 열리는 시간의 길 위에서 이성이 감성에게 이른다. 우리 오늘은 어린아이인 채로 살아보자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 속에서 놀아보자고, 그게 만물의 시詩고 길이라 하지 않더냐고. 고조곤 타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