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 / 변종호

 

 

예불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선암사 경내를 돌아 산기슭을 기어오른다. 두~둥 두~둥 위를 시작으로 안에서 밖, 밖에서 안으로, 우에서 좌로 이어진다. 양쪽에서 스님 두 분이 춤을 추듯 커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번갈아 두들긴다. 쏟아져 나오는 파동이 전율을 일으킨다.

생경한 의식이라 경건하게 지켜봤다. 저승으로 떠난 소가 북이 돼 울었다. 두두~둥둥 울리던 북소리가 가슴을 뚫는다. 붉은 해를 삼켜버린 조계산으로 사위는 흐릿해지나 방문객은 합장하고 바라본다. 한동안 울리던 북소리가 지상의 생명을 제도한다는 범종 소리로 끝맺었다. 귀갓길, 울려 퍼지던 대북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두들겨 맞아야 울고 울어야만 길을 내는 대북은 여러 쪽의 소나무로 몸통을 짜고 양면은 소가죽을 쓴다. 부드러운 암소 가죽은 튀는 음을 잡아주는 저음으로, 강한 울림에는 탄력 있는 황소 가죽을 쓴다. 북채가 닿을 때마다 가슴을 울렸던 선암사 법고 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묘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대북에 궁금증이 일었다.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북 장인을 찾아 생생한 체험담과 풀어놓지 못한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해당 기관에 신원과 목적을 알리고 나서야 소재지를 알아냈고 어렵사리 공방 방문을 허락받았다.

두 시간을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일흔 중반의 산전수전 겪어낸 장인 얼굴은 주름은 깊었으나 자그마한 체구에도 눈동자만큼은 집념으로 이글거렸다. 거칠고 뭉툭한 손이 악수를 청했다. 도심 외곽의 폐업한 공장을 임대하여 쓰는 공방은 예상보다 낡고 허름했다. 3월 초인데 사무실에서 메모하는 손이 시렸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국가무형문화재에 작업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역에서 서성대던 열 살 소년을 데려다 넝마주이를 시켰고 소아마비를 앓은 불편한 다리라 늘 양을 못 채우자 뺨을 때려 한쪽 고막을 잃게 했다. 맞고 욕먹는 게 싫어 탈출한 아이는 여수 시장을 배회하다 황용욱이 거두며 북에 입문하였다. 몇 해가 지난 뒤 왜 저를 거뒀냐는 질문에 스승은 손재주가 있어 보였다며 북을 배우면 놀림도 받지 않고 밥도 굶지 않을 거라 했단다.

좋은 북의 으뜸 조건은 가죽이다. 습도 변화에도 소리가 달라지지 않는 가죽을 얻는 과정은 번거롭고 고단했다. 도살장에서 신선한 생피를 구해 계분과 석회를 탄 물에 사흘 담갔다 무딘 칼로 털과 지방을 제거하기란 좋은 가죽을 얻겠다는 집념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이런 가공은 악취와 폐수 문제로 할 수가 없어 지금은 공장에서 구매하여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부위별로 장인만의 기술로 깎아서 쓴다.

“여태 가죽하고만 살았지, 가족과는 살지 못했다.”는 장인. 가죽을 다루느라 자다가도 눈뜨면 가죽,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죽밖에 떠오르지 않아 자식도 하나밖에 낳지 못했단다. 이렇듯 옥죄는 삶이니 친구나 지인이 있을 리 없어 삼겹살에 소주 한잔의 추억도 없고 헤어진 가족의 안부도 모르고 살았노라 술회하던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다리가 불편한 데다 북을 두들기며 소리를 잡느라 삼십 대 후반에 남은 귀마저 잃었다. 얼마나 황망하고 막막했을까, 북 만드는 사람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라 생명을 잃은 거나 매한가지다. 운명처럼 닥친 시련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한 생을 살면서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역경을 견뎌낸다는 것은 처절한 몸부림이자 서러움이었다.

악성 베토벤이 “고난을 헤치고 환희로”라는 자신의 좌우명처럼 처한 운명을 극복하고 베토벤 교향곡 5번과 9번이라는 명곡을 남기지 않았던가. 장인은 무시로 북을 치면서 전해지는 음을 손으로 익혀나갔다. 북을 치면 가죽이 떨리며 이어지는 미세한 진동을 손끝으로 감지하고 가슴으로 느끼며 세밀하게 조율하였다. 귀 대신 손으로 고르는 명고名鼓의 출산이 하루아침에 가능했겠나, 무수히 두들기고 만지며 시행착오를 반복해 가면서 얻어낸 인간승리였다. 오죽하면 보청기를 낀 귀보다 손끝을 더 믿는다니 가슴이 먹먹했다.

쇠심줄같이 질기고 힘겨웠던 고난 속에도 좋은 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리니 이름이 알려졌다. 북을 칠 줄 알아야 잘 만든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고수鼓手에게 북을 배운 것도 한몫했다. 서울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울려 퍼지던 대북 메우기에 참여를 시작으로 청와대 춘추관 대북, 임진각 통일전망대 대북, 대전엑스포 대북에도 동참하였다. 이후 안양시민 대북과 천태종 해동사 법고, 평창 패럴림픽 대북, 서울 관문사 법고는 순수한 장인의 손에서 태어났다.

북 메우기 외길 인생에 어찌 고비가 없었겠나, 수없이 넘어야 했던 크고 작은 고개로 흔들리기도 했고 좌절도 했으리라, 단순 밥벌이로 여겼다면 진즉 던져버릴 일이었다. 흰머리 성성해지고 몸은 굽어가도 전통을 잇겠다는 각오는 변함이 없다. 사실 우리의 전통은 맥이 끊기면 잇기가 어려운데 인식과 경제 논리로 외면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가시밭길을 자식이 걷겠다니 후계를 두는 기쁨보다 천륜으로 억장이 무너졌다. 자식만큼은 힘들게 살지 않길 바라며 말렸으나 끝내 전수의 길로 들어서자 받아들일 수 없는 며느리가 대문을 박차고 떠나던 날 장인 가슴에는 대못이 박혔다.

낯선 거리에서 가림막이 없이 찬바람과 맞설 때는 부모형제를 향한 그리움은 사치였다. 그의 인생에 쉬운 길도 곧은 지름길도 없었고 양지쪽 돌산에 뿌리내린 꼬불꼬불한 소나무처럼 모질게 살아낸 인생역정이다. 그런 당신이 2022년 10월 국가무형문화재 제725호 악기장으로 지정되었다. 60여 년간 소아마비와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불편함과 불우한 가정, 열악한 환경을 모두 극복하고 우뚝 선 정상이 아닌가. 무형문화재 악기장이 목표는 아니었고 좋은 북메우기를 업보로 여기며 숭고하게 인생을 바친 보상일 뿐이다.

끝이 안 보이던 결핍과 시련이라는 인고의 강을 건너선 당신, 마지막 간절한 바람은 선덕여왕신종처럼 영구 보존되는 북을 메우는 것이다. 가죽은 100년이면 산화하기에 형상과 소리가 변하지 않게 연구개발한 영신의 북이 선보일 날도 머지않다는 생각이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북을 만들겠다는 당신은 오래된 북이라도 손길이 닿았던 것은 단박 골라낸다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삶을 이어온 임선빈 장인의 투박한 손끝이 미세한 떨림을 고르고 가슴으로 느끼며 탄생한 대북은 맑지만 결코 가볍지 않으며, 멀리 퍼지나 거슬리지 않고, 낮지만 무겁지 않은 명징한 북소리는 그의 혼이 가득 담긴 영혼의 소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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