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머무는 정자 / 허정진
간이역 같은 여백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여기에서는 느려질 것만 같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 대신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글씨다. 채마밭 가장자리에 잡초들 자리 잡은 빈터이고, 둥지 속의 어린 새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허공이면 어떠랴. 조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빠르게 가는 직선이 아니라 천천히 둘러 가는 곡선이어야 가능하다. 서늘한 바람 따라 먹과녁 같은 초행길 가듯 걷다 보면 산수 좋은 곳에 만나는 정자(亭子)가 하나 있다.
경북 예천의 초간정(草澗亭)이다. 계곡물이 흐르는 높은 언덕 위에 학 같은 고고한 자태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푸른 이끼 낀 돌담을 전설 삼아 시간의 수인처럼 홀로 세월을 지키고 있다. 고적하면서도 우아한 팔작지붕의 정자와 울창한 노거송, 기묘한 바위들로 둘러싸여 마치 기승전결이 완벽한 수묵화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시절 좋은 사극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공을 초월한 주변의 풍광이 느린 여백들로 넘쳐난다.
이곳에도 시차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싯푸른 물소리가 이 세상 반대편에서 온 마른 가슴을 찬찬히 적셔준다. 일렁이는 잎새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고 습자지처럼 투명해진 맑은 공기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종종거리며 살아내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결이 어느새 제 호흡법을 찾아 잘 여문 옥수수처럼 가지런해진다. 여백이 키워놓은 정자의 운치와 기품이 볼수록 청정하고 웅숭깊다.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자신보다 주변을 위해서 똑바로 서 있어야만 했던 날들이 많았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사막의 길을 걸어가는 낙타와 같다. 길에 묶인 생은 차갑고 가파르기만 하다. 죽음이 길을 가로막을 때까지 신기루 같은 삶을 걷고 또 걸어가야만 한다. 채우면 그만두리라 다짐하지만, 욕심은 누구에게도 가득 차는 법은 없다. 바쁘지만 왜 바쁜지, 일에 대한 의욕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지는 오래전에 망각하고 산다.
정신적 여백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 편리함에 길들어진 현대인의 문명화된 삶은 속도만 중요할 뿐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삶에 대한 물음도, 자신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생각, 미안하다는 표현도 사라지고 사랑과 의리, 낭만 같은 단어들도 고전이 되어버렸다, 주변의 냄새와 소리에 귀를 닫고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에 의존할수록 자꾸만 메말라가는 영혼이 두렵기만 하다.
정자의 길목에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잠시 머물고 갈 자리인데도 냉큼 안부 같은 그늘 한 장 깔아준다. 반가움에 “와~”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계자난간에 슬쩍 궁둥이를 붙여본다. 대청마루에 선조들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인 듯 기둥 위 누마루에서 보는 바깥도 온전한 풍경이다. 시끌벅적한 세상 소음들이 역사의 무게감에 잠시 정지된 듯 주위는 고요하다. 산새의 날갯짓도 정(靜)의 소리고 몸짓이다.
먼저 반기는 것이 바람이다. 마음은 자유로운 새를 닮고 몸은 늘 푸른 청송으로 태어난 바람이 초간정에 세를 들어 산다. 묵은 세월 땀내에 절은 나를 일진청풍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기둥 사이를 돌아 빠져나간다. 수고했다며,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묵묵히 제 길을 가라는 바람의 전언을 듣는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바람의 존재가 내남없이 반겨주는 고향 집을 찾은 것처럼 오히려 든든하다. 바람의 정자인 듯 그늘을 이불 삼아 잠시 눈을 붙여보고 싶다.
여백이 있는 삶은 어쩌면 비움이 아닐까 싶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대나무가 곧게 자라는 것도, 범종이 멀리 울려 퍼지는 것도, 구들장이 따뜻한 것도, 북소리가 둥둥 우렁찬 것도, 배가 물에 뜨는 것도, 피리가 맑은 소리를 내는 것도, 연탄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제 속을 비웠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일도 삶의 여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고 너그러워져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인가 보다.
어쩌면 여백이란 타인이 아닌 자기 삶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시선이 아닌 오롯이 내 선택으로 사는 삶, 내가 기쁘고 편안한 삶,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들여야 할 것과 밀어낼 것을 구분해서 사는 주관적인 삶을 말하는 것은 행여 아닐까.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중심을 둔 시간,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에 집중하며 사는 삶이다.
색바랜 기둥마다 정감 묻은 시가(詩歌)의 향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야기에 목마른 필경사처럼 선인들의 곧은 붓끝, 그윽한 먹물 향기에 빠져보는 것도 여행의 덤이다. 얼마나 많은 길손과 소인묵객들이 다녀갔을까. 흰 두루마기 깃 눈부신 하늘에 지혜의 푸른 서기 한 줄기 바람으로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절개 굳은 선비들 썩은 권세 버리고 녹차 한 잔으로 부끄러운 세상 비우고 비웠을 테다. 물리고 버릴 것 분별하고, 지키고 되살릴 것 잊지 않는 저 꼿꼿한 선비정신을 느끼며 내 삶에도 숨구멍 하나 열어 둔다.
여백은 삶의 흔적을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 그립고, 인생이 되돌아 손짓할 때 그 여백 속에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 여백은 어느 순간의 눈물로, 웃음으로, 감동으로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눈빛으로, 친구와의 우정의 목소리로, 봄 햇살 따뜻한 창밖에 커피 한잔으로, 여행길에 만나는 별빛이나 바람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을 잠시 잊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시간 밖의 시간에 서서 일상이라는 무게를 잠시나마 떨쳐내 본다. 앞뒤도 없이 달려가는 어제와 오늘, 가야만 하는 행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을 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백을 한번 찾아 나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