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 곽흥렬

 

 

 

바야흐로 다시 유월을 맞는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무엇에라도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앞산 기슭의 충혼탑 쪽으로 이끌리곤 한다. 꽤 오랜 세월을 그리 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레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보료처럼 정갈하게 가꾸어진 잔디밭, 선열들이 흘린 선홍 핏빛으로 피어난 장미며 소복 단장한 미망인을 닮은 백합,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야생화, 싱그럽게 푸르른 키 큰 나무들……, 나라 위해 목숨 바치신 님들의 고귀한 넋이 풀로, 꽃으로, 나무로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유월, 이 유월은 누가 뭐래도 우리 민족에게는 그냥 건너뛰고 싶도록 참으로 가슴 아픈 달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결코 기억의 책력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분주한 일상에 쫓기며 까마아득히 잊고 지내다가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듯 해마다 유월만 가까워져 오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이 겪으셨던 그날의 모진 겨우살이가 다시금 새록새록 되살아나 마음이 생인손 앓듯 아리어 온다.

얼마나 많은 영령들이 이 푸르른 강토를 붉은 침략의 무리로부터 지켜 내려다 값진 피 흘리며 스러져 갔는가. 오늘의 이 산하에 두루 넘치는 자유와 평화와 은혜로움은 온전히 님들께서 수호신이 되어 돌보아 주시는 음우陰佑 덕분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사람은 가고 없어도 자취는 남는 법. 꽃부리처럼 화려한 명성이었든 들풀같이 소박한 이름이었든, 조국을 위해 바친 불타던 나라 사랑의 마음이야 조금인들 더하고 덜함이 있을 것인가. 세월이 흐르고 역사는 바뀌어 가도, 그 뜨거웠던 정신만은 우리 후손들의 가슴 가슴마다에 영원무궁토록 잊히어져서는 아니 되리라.

지금 나는 이 현충탑 앞에 서서, 두 손 모두오고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인다. 이제 나라 걱정일랑 훌훌 내려놓고 따스한 조국의 품 안에서 길이길이 평안히 잠드시라고. 그리고 이 나라, 이 강토, 이 겨레를 오래오래 굽어살펴 주십사 하고.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일인가. 그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신님들의 거룩한 희생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 정황을 상상 속으로 그려 본다. 언감생심,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아니 될 터이지만, 그래도 만일에 지금 또 한 번 지난 세월같이 나라의 운명이 존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비극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과연 님들처럼 기꺼이 한목숨 내놓을 수 있을는지……. 아무리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을 이 어디 있으랴. 제 목숨 아깝지 않을 이 누가 있으랴.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주검들이 언덕을 이루어 가던 그 참혹한 전장 속을, 오로지 조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호국의 영령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좀 더 자주 겨레와 함께 푸르를 조국의 성지인 이 충혼탑을 찾아, 가신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으면 좋겠다. 그 뜨거웠던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이것이 님들의 값진 희생에 백분지 일, 아니 만분지 일이라도 갚음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에 잠겨 상념의 골짜기를 더듬고 있노라니, 어느새 마음이 숙연해 온다.

뉘엿거리는 저녁 해를 뒤로하고,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때마침, 영령들의 넋인 양 한 무리의 산비둘기 떼가 후루룩 머리 위로 날아오른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