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되려나 봐 / 안춘윤
유리문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늦가을 아침 속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할아버지가 마치 낯선 세상을 바라보듯 안을 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과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빈틈없어 오만하기까지 했던 단골손님이었다. 자수성가한 어르신으로 타인은 물론 자신의 부족함도 용서하기 힘들다고 하셨던 분이었다.
문 안에서 나는 그분 시선의 끝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미 세상의 길도 그 길 위에 있던 모든 인연도 지워지고 있는 듯했다. 뒤따라온 아들의 손에 끌려가면서 어르신은 자꾸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눌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궁금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찾아온 곳, 어떤 잔상으로 그분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분이 늘 자랑하던 가족도 집도 어깨 힘주며 휩쓸었다는 거리도 아닌, 누구도 손을 잡아줄 수 없는 그 만의 세계에서 찾아온 마지막 세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택시 기사에게 약국 이름만 수없이 반복했다 하더라고 전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실오라기처럼 남았던 의지의 흔적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찾아오신 것 같았다.
한곳에서 오래 약국을 운영하다 보면 가족 같은 손님들이 있다. 십여 년 인연인 여자 손님도 그랬다.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분이었다. 백발의 숏커트 머리와 검지에 낀 커다란 보석 반지가 인상적이었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 그분이 오랜만에 약국에 방문했다. 하지만 나도 그분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살아온 세월이 잠시 소풍 갔다 온 것처럼 생각되네. 가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집이 어디인지 머릿속이 하얘져. 그렇게 어딘가로 훨훨 날아가다 깨어나지.”
그러면서 ‘나는 죽으면 나비가 되려나 보다.’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곁을 지키던 딸은 말없이 유리문 밖을 보았다. 유리문 밖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했다. 끝을 알 수 없는 투명한 푸름이 너무 눈부셔서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말도 무의미해 보였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애를 썼다. 나도 그분도.
한 사람의 생이 차곡차곡 미로와 같은 뇌에 저장되다가 치매는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지우기 시작한다.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두려움이고 바라보는 이에게는 상처가 된다. 그녀의 말이 중간중간 끊어지며 길을 잃어버릴 때, 오늘 같은 내일이 그나마 남아있을까. 나는 불안해하면서 그저 또 하루의 일상을 듣는 척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수건을 꼬옥 움켜쥔 채 때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말갛게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허둥거리곤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내가 자괴감에 시달리는 순간이었다.
살아온 흔적은 물론 자신의 존재감마저도 사라져 가는 치매가 절박한 이유는 기억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같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그 막막한 절벽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여 눈물도 흘릴 수 없을 만큼 텅 비어버린 어둠만이 남겨졌을 때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가 있을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었던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었다. 많은 작품 속에서 그는 늘 넉넉한 웃음으로 세상을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푸근한 그의 미소와 유머 앞에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고단한 삶도 이해받고 누구의 생도 가치가 있으며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생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연기에서 보여주었던 진정성이 정말 한낱 포장에 불과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가 루이소체 치매라는 퇴행성 뇌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 치매는 진단도
치료도 어렵고 운동기능 저하와 인지기능 저하를 함께 겪는다고 한다. 인지능력의 상실은 물론 움직이는 것도 걷는 것도 힘들어지고 정신적인 공황도 심하게 온다.
그는 병이 진행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지경에도 온 힘을 다해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홀로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떨면서 움직이는 것 자체도 힘들었을 순간에도 그는 배우였다. 한 발자국, 한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웠던 마지막까지 그는 위대한 연기자였다. 주변 스태프들이 알아채고, 가족이 알게 되고 인간의 의지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생을 내려놓았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병은 우리를 좌절시킨다. 특히 노년에 의지와 상관없이 지각과 인지가 서서히 소멸해가는 질병 앞에 서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망연자실하게 된다. 그저 또 하나의 과정처럼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미약한 의지라도 남았을 때 생사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럽다.
파킨슨병 환자인 의사 김혜남을 생각했다. 정신과 의사로 파킨슨병을 앓으며 서서히 굳어가는 육신과 신경세포의 사멸로 오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글을 썼던 작가.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라며 ‘한 발작씩 떼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라고 고통이 정지되는 틈새 순간에도 희망을 보았던 그녀. 그때마다 할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덮는 일’을 하며 생에 불어온 거친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살아가는 작은 거인, 이제는 사지도 거의 움직여지지 않아 어눌해진 발음으로 녹음하는 것이 그녀의 집필 방식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꼈다.
하지만 옳다 그르다를 떠나 마지막까지 명연기를 펼치며 최선을 다했던 로빈 윌리엄스의 마지막 선택은 나의 마음을 울렸다. 배우로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병마의 고통으로 뒤틀렸던 육신을 버리고 떠난 그는 얼마나 가벼웠을까. 모든 세상의 허물을 벗고 나비처럼 자유로이 떠나간 그는 영원한 나의 배우였다.
나에게 그런 순간들이 다가올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치열하게 주어진 고통마저 감사히 끌어안고 살아가는 파킨슨병 의사, 마지막까지 배우이기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내려놓았던 배우. 결국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감히 단언하기 어려워진다.
기억을 가진 자만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해서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오늘만 있는 사람들. 매 순간 징검다리로 건너는 이들의 떨리는 손을 잡고 시간의 징검다리를 함께 건네주고 지켜보는 것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문득 말없이 앉아 있던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를 너머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텅 빈 눈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들락날락 사람들로 어수선한 공간 한 귀퉁이에서 마치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비가 되려나 보다!’ 나도 모르게 그녀 말이 생각났다. 그런 엄마를 아기 돌보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손을 다독거리는 딸의 모습이 애틋했다.
얼마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아하게 나가는 모녀에게 나는 무심한 척 말했다.
“그냥 생각나면 언제든 오세요. 늘 이 자리에 있으니까요.”
멍멍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