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은 바구니 속에 누워 있던, 같은 날 태어난 수십 명 아기들의 얼굴, 팔찌가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20년 전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애들을 다시 그렇게 나란히 줄 세워본다면?

자라면서 우리 얼굴이 그토록 다양해지는 건 각자 자주 쓰는 얼굴 근육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구분하는 건 물론 이목구비의 생김새겠지만 나이 들면서 차츰 얼굴 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이 이목구비의 원래 생김을 덮어버린다.

얼마 전 한 신문 칼럼에서 폴 에크먼(Paul Ekman)이라는 학자의 연구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그는 세계를 돌며 온갖 민족의 갖가지 표정을 사진 찍어 와서 꼼꼼하게 분류해 냈다.. 사진들에서 에크먼 교수가 찾아낸 얼굴 근육은 총 43가지였고 그의 작업은 이걸 작동 단위별로 나누어서 일련번호를 붙이는 일이었다.

에크먼은 “얼굴은 2개의 근육만으로 300가지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고 3개 근육으로는 4,000가지, 5개 근육을 서로 달리 조합하면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1만 개 이상의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 냈다.. 그토록 다양한 조합 중에서 에크먼은 특별히 유의미한 표정 3,000개를 골라내서 거기 쓰인 근육에 번호를 붙여나갔다.

얼굴 작동부호 시스템으로 에크먼이 얻어낸 것은 한둘이 아니다. 심리 변화가 근육을 움직이지만 반대로 근육의 움직임이 심리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이다.

에크먼식 슬픔 제조법도 있고 웃음 제조법도 있을 수 있다. 좋은 웃음의 기본은 광대뼈에서 입술 가장자리를 잇는 대협골근과 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안륜근 등 두 가지 근육에서 나온다. 이 두 근육을 움직이면 눈꼬리에 주름이 잡히면서 뺨과 입술 양끝이 약간 위로 올라가게 입이 벌어지는데 에크먼은 “이 두 근육을 사용하는 웃음이 뇌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지배하는 부분을 자극한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따라서 일부러 이 근육을 움직여 웃는 표정을 만들면 근육 움직임이 대뇌를 자극해 웃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까지 의도적으로 생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픔 제조법도 간단하다. 눈썹을 내리고(4번 근육) 윗 눈꺼풀을 올리고(5번) 두 눈꺼풀은 좁히고(7번) 입술을 밀착시키면(24번) 슬픈 표정이 만들어진다. 이 표정이 만들어지면(일정 근육이 작동을 하면) 곧이어 심장박동이 12~14회 올라가고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단다. 희한한 일이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내 마음이 실은 내 얼굴의 근육에 따라 변하다니! 이런 연구가 심리학의 한 분야라는 것도 흥미롭다.

이 ‘얼굴 작동 부호화 시스템(facial action coding system)’을 에크먼 시스템이라고 부르는데 만화영화「슈렉」이나「토이 스토리」를 만들면서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에크먼에 따르면 혐오는 작동단위 9로 코 찡그리기를 담당하는 윗입술콧방울 올림근의 몫이다. 공포는 작동단위 1, 2, 4 즉 속눈썹 올리기(이마근 내측부 근육)와 눈썹 올리기(이마근 내측부), 눈썹 내림근이 동시에 움직여 만들어내는 표정이다. 여기에 5번(윗눈꺼풀 올림근)과 20번(입술을 잡아늘이는 입꼬리 당김근)이 추가되면 공포는 더욱 생생해진다. 중앙일보.중앙일보 2006년 5월 10일자「분수대」이정재 기자의 글 참조 -필자 주

에크먼의 연구는 거꾸로 표정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인간의 현재 심리상태를 읽어내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몇 번 근육을 주로 움직이는지를 에크먼은 정확하게 가려낸다. 수사관은 피의자의 얼굴 근육의 변화로, 심장박동으로 측정하는 거짓말 탐지기보다 훨씬 정확하게 진실 여부를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은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눈 깜빡임 같은 사소한 신체 떨림, 목소리 주파수의 변화 등 비언어적 단서들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엔 총 178개의 근육이 있고 그중1/3쯤인 50개가 얼굴에 집중돼 있다(한편 미국 스탠퍼드 의대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사람이 한바탕 크게 웃을 때는 인체의 650개 근육 중 231개가 움직여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라고 했으니 총 근육 수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해 봐야겠다).). 표정이란 이 50개 얼굴 근육들의 수축과 이완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감정이 변하면 얼굴에 있는 일정 근육이 수축한다. 근육의 수축은 파동 치는 물결처럼 피부 속 진피에 전달되고 진피 속 미세 세포들이 다시 수천 개의 수축으로 대응한다.

우리가 어떻게 울고 웃고 환호하고 화내고 동경하고 혐오했는지를 얼굴 근육들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해 둔다.. 그리고 그 반복을 누적했다 슬그머니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표정이다. 인간은 제 감정의 역사를, 정교한 바이오그래프로 만들어 각자 하나씩 쳐들고 다니는 셈이다. 차갑고 엄숙한 디자인이다.

거울 앞에서 일부러 웃는 표정을 지어볼 필요가 있다. 자, 얼굴에서 어떤 근육이 수축하고 어떻게 파동 치는가.. 우리는 평소 얼굴의 50개 근육을 골고루 사용하지 않는다. 쓰는 건 기껏 여나믄 개밖에 없다. 쓰지 않는 근육들이 처지고 약화되는 건 얼굴이라고 다른 근육과 다를 바가 없다. 충남 천안시 병천에서 황토집을 짓고 오이농사를 짓고 사는 김정덕 할머니는 독특한 얼굴근육 운동법을 개발해 아침마다 몇 분씩 반복한다. 입꼬리를 위로 당겨올리고 눈꼬리를 관자놀이로 당기면서 펴는 운동이다. 일흔 중반인데 50대 같은 얼굴을 유지하는 김 할머니도, 마흔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는 링컨도 에크먼을 직접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들의 관심은 맞추어 같다. 에크먼의 달라이 라마 연구도 비슷한 관점이다. 달라이 라마의 표정이 나이를 구분할 수 없이 생기 있고 유연한 이유를 찾다가 그는 알게 됐다. 달라이 라마만큼 얼굴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달라이 라마는 전혀 가식적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제 감정에 거리낌이나 숨김이 없으니 철저히 자기 감정에 몰입했고 몰입은 얼굴 근육 전부를 사용하게 만들어줬다. 감정에 몰입한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인 모양이다. 슬픔도 흘려보내고 기쁨 또한 흘려보낸다. 순간의 감정에 어린애처럼 정직해지면 그걸 흘러보내는 것도 그만큼 쉬워지리라. 순수하게 기뻐하고 순수하게 슬퍼하고 순수하게 열중하면서 사는 사람은 살수록 얼굴 근육이 맑게 단련된다. 늙어서 아래로 쳐지는 게 아니라 힘차고 그윽하게 깊어진다. 성형외과 의사가 얼굴에 칼을 들이대서 찾아내는 미보다 훨씬 확실하고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다. 나이 들어 제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스스로의 책임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정확하고 가차없이 표정에 드러난다. 너무 욕심 부리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화를 내지도 말고, 제 얼굴 근육을 상냥하게 달랠 수밖에. 아니 반대다. 제 얼굴 근육을 상냥하게 달래면서 제 마음속 탐진치를 어루만질 수밖에! 학문이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에크만의 저 집요한 표정 연구도 결국 우리더러 이렇게 말하는 게 목적일 것이다. 탐진치에 빠지지 말라. 눈앞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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