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향 / 김순남

 

 

향기였다. 코끝에 닿는가 싶더니 가슴속까지 아니 온몸으로 그 향내가 스며들었다. 여행지에서도 이른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일행들 몰래 살며시 밖으로 나왔다. 호박엿, 마른오징어, 명이, 부지깽이나물 등 특산품 상점들이 즐비한 길에 유독 한 곳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서너 명의 여행객들이 향나무로 만든 공예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친근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상점으로 이끌렸지 싶다. 사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울릉도 향나무의 고운 향내를 감각 기관이 단박에 기억해낼 줄은 미처 몰랐다. 울릉도의 향나무는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세찬 비바람을 맞고 자라 다른 지역 향나무보다 단단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 향내 또한 깊고 부드러우며 석향石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친정집에서는 제사 때마다 그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지에 고이 싸서 간직해온 향나무를 잘게 쪼개어 향합에 담으셨다. 정갈하게 준비하신 제수를 정성스레 차리신 후 놋쇠 향로에 잿불을 담고, 쪼개어 놓은 향을 향로에 조금씩 집어넣으셨다. 온 집안에 퍼지는 향내와 함께 조상께 드리는 제례가 시작되었다.

증조부님은 향기를 밟고 오시는 걸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몇 해 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산소에 성묘 갈 때나 흔적을 볼 수 있는 분, 성품이 대쪽 같으셨다고 했다. 자식들의 게으름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으셨다며 부지런하신 아버지께서 증조부님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식솔들을 위해 충북 단양 산골에서 거친 산과 바다를 건너 울릉도까지 가셨다니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했을까. 몇 년을 힘든 일을 자처하신 증조부님 덕에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라도 밥 먹고 살 수 있었다고 누누이 들어왔다. 제례를 마치고 음복도 끝났지만 향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증조부님은 우리 가족 곁에서 늘 지켜보시는 듯 여겨졌다.

임종을 앞두고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손부인 어머니를 발치에 불러 앉히어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다. 자식을 키울 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라 이르시고, 덧붙여 몇 가지 당부 말씀도 하셨는데 주로 부지런함과 인연의 소중함을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이른 새벽 불이 켜지는 집이었고, 이른 아침밥을 먹고 논밭으로 누구보다 먼저 나가시는 부모님이셨다.

주먹만 한 향나무였다. 아버지는 제사 때마다 쓰는 그 향나무를 증조부님께서 울릉도에서 손수 가져오신 거라며 소중히 여기셨다. 예전에는 울릉도 향나무의 귀함을 모르고 무분별하게 캐내었다고 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험준한 곳에만 조금씩 남아 있어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한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을 쓸어내린다.

도동항을 잇는 길을 천천히 한발 한발 새겨 밟아본다. 긴 세월을 되짚어 백삼십여 년을 훌쩍 뛰어넘으면 울릉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척박한 이곳에서 증조부님은 무슨 일을 하셨을지.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기를 꿈꾸며 오징어잡이를 하셨을까. 나물 채취를 하셨을까. 넓지 않은 이 섬 어딘가에 증조부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

가파른 산 절벽에 향나무 한그루가 도동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천 년을 족히 살았다는 노거수가 안개를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수년 전 태풍에 많은 가지를 훼손당하고 한쪽 가지만 남아 보호를 받고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멀리서 향기를 느끼고 바라볼 뿐이다. 기암괴석 바위틈에 몸을 기대고 오랜 세월 해풍과 눈보라를 어떻게 견디어왔는지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도동항에서 아련히 보이는 향나무는 한 번도 얼굴을 뵌 적 없는 증조부님 모습인 듯 내게 말을 걸어온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향기가 적으며 쉽게 꺾인다. 온갖 고난을 견디며 자란 향나무가 단단하듯 우리의 삶도 다를 바가 없다고 이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바위틈에서 뿌리를 지탱하고 거센 태풍에 가지들을 내어주고도 의연히 도동항을 수호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은 울릉도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를 온몸에 담아 보여주는 듯하다.

삶이 팍팍하고 힘들 때, 울릉도라는 말만 들어도 무작정 달려오고 싶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향이 깃든 땅을 밟아보고 석향의 향기를 느껴 보고야 이곳을 향하는 마음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내게 중심을 잡도록 지켜준 것도 증조부님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후손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을 되새겨 본다.

거칠고 볼품은 없지만, 토종 울릉도 향나무 ‘석향’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두 아들에게도 이 향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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