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 혹은 외양간 / 안병태
안채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멀찍이 텃밭에다 흙벽돌로 움막을 지었다. 비록 초라한 토굴이지만 여기는 내 불가침의 영토요 낙원이다
서촌토굴西邨土窟 문을 열면 정면에 내 영정이 걸려 있다. 원판이 부실하니 사진 또한 보잘것없다. 게다가 약장수가 동네에 뿌린 무료 '長壽사진'이니 오죽하랴. 논두렁 벌초하다 불려가 태양이 눈부셔서 찡그리는데 대뜸 셔터를 눌러버리더니,
"다음 어르신!" 한다.
현상수배자 사진 같다. 그런 걸 왜 걸어뒀느냐? 만일 내가 예고 없이 초록별을 떠나더라도 주민증으로 영정사진 확대하느라 부산 떨 필요 없고, 솔직히 이젠 얼굴 살이 빠지고 광대뼈가 솟아올라 저 상태 이상 기대하기도 어렵다. 영영 헤어지는 석별의 자리, 조문객의 작별 인사를 받았으니 마지막 정표로 윙크로나마 답례를 드릴 밖에.
남향 통유리 앞엔 서안이 놓였고 그 위에 노트북이 올라앉았다. 양복에 갓 쓴 듯 어색하다. 저 서안에서 원고지에 만년필 잉크를 솔솔 흘리며 수필 무서운 줄 모르고 겁 없이 덤비던 하룻강아지 시절이 그래도 즐겁고, 좋았고, 그립다. 요즘도 책 받은 답서만은 '파카21'로 쓰지만, 미개봉 책들은 나날이 쌓여가고, 이젠 장시간 정독 또한 어렵다.
비가 오시는 날은 저 통유리창 앞에 종일 앉아 있기도 한다. 멀리 소금강산으로부터 무장산, 토함산, 남산을 거쳐 집 주면 무열왕릉 일대 고분군까지 촉촉한 경주 풍광이 안전에 전개되노니.
"거금 들여 집 짓는다더니 기껏 공동묘지로 들어왔구만!"
"거대한 젖무덤들 사이에 아주 파묻혀 지내는군!"
무열, 진흥, 진지, 헌안, 그 외에 숱한 왕릉들을 싸잡아 불경스럽게 희롱하는 소인배들 안목으로야 이 운치와 사치를 어이 알리.
법정 스님이 황토방을 짓고 나서, '방석, 등잔 외엔 아무것도 들이지 않겠노라'며 『오두막 편지』에 선언했다. 나는 한술 더 떠 목침 하나만 달랑 던져놓고 '밤마다 별을 세며 잠들겠노라' 했다. 스님의 열반 소식에 문득 그 선언을 상기하고 내 황토방을 둘러보았다. 가관이다.
필요할 때마다 안채에서 한 권 두 권 야금야금 옮겨다 쌓아놓은 책무더기 사이사이로 도무지 버려 마땅한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비집고 들어앉았다. 내 운동량 부족을 염려해 뒤꼍 사는 불청객(지네)들이 나들이 와 술래잡기를 시킨다
군불을 너무 지펴 검붉게 탄 아랫목엔 이불이 ∩ 형태로 굳어 있다. 내가 저녁에 기어들어갔다가 아침에 기어나오는 터널 입구나.
가끔 안채 주인 '사임당 권 씨'가 들여다보며 행랑채 간섭하듯, "뱀 나올라, 외양간 정리 좀 하고 살지!?" 잔소리만 빼면 고요하고 평화롭다. 스님 황토방엔 끝내 방석, 등잔밖에 아니 남았겠지만 '무소유'도 아무나 흉내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안채 주인이 왜 권 사임당이냐? 영정사진 찍던 날 통장이 전화했더니,
"저는 나중에 오만 원권 확대해 걸어놓으면 되지요" 하더란다. 그날 이후 통장은 나를 만날 때마다,
"율곡 선생 모친 잘 계시지요?" 하고 안부를 묻는다. 둘 다 진작 문학을 배웠더라면 은유의 대가가 될 것을, 애석한 일이다.
도서관 사서 최 시인 집에 책 빌리러 간 적이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니 서재만큼은 깔끔하게 정리됐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 거기는 사뭇 밀림이라 악어가 기어나올 지경이었다. 추장 가라사대, 짚신장이 헌신 신고 옹기장이 깨진 그릇 쓴다나?
이 밀림 추장이 장서 자문역을 맡은 어느 여류화가가 저녁에 초대받아 갔었다. 거실 전체를 서가로 꾸며 장르별, 국내외별, 시대별, 작가별… 정리정돈 상태가 대패로 다듬은 듯 가지런했다. 대단한 여류다. 살림은 언제 하고, 책은 언제 읽고, 그림은 언제 그리나? 고개를 갸웃거릴 때 추장이 소곤거리기를,
"눈으로만 구경하이소, 책은 안 건드리는기 좋을끼구마."
주의를 환기했으나 반가운 책이 보이기로 무심코 뽑았다가 원위치를 시키지 못해 혼났다. 건드릴수록 빼뜰거려 땀이 나더니 숨이 막혔다. 아닌 게 아니라 내 토둘은 외양간이다. 부부동반으로 초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독자가 눈으로 보듯 상세하게 '작가의 글방'을 써주십사 전화가 왔다.텃밭에서 상추를 다듬던 권 사임당이 엿듣고는 아주 신이 났다.
"작가의 글방? 그게 글방이야? 외양간 사진 찍어 보내자면 움막 짓고 13년 만에 대청소하는 꼴 처음 구경하겠군. 잘코사니!"
악담은 일취월장이나 대꾸 무언이다. 심란해 청탁서를 열어보니 짜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사진 첨부' 말이 없다. 사나흘 고역을 덜었다. 전화하려다가 참았다. 공연히 혹 붙일라, 아니, 긁어 부스럼 만들랴.
탈고의 순간을 오르가슴에 버금간다고 토로한 주책이 있다. 그는 아무 데서나 그런 걸 느끼나보다.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해 미루던 원고를 마감날 벼락치기 해치우고 만세! 자는 사람 불러내 술 먹이더니 그게 그런 날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홀가분한 그 맛조차 없다면 숙제는 또 하나의 번뇌일 것이다.
도처히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어 섭섭하더니 이제야 금아 선생의 수필 발표 중단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나 역시 수필을 누추하게 만들기 싫어 청탁을 사양하지만 강권할 때면 갈등을 느낀다. 더 다듬을 것도 없건만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깎고 또 깎는다. 너무 깎았다 싶어 이것저것 주워 붙이다보면 엉뚱한 홍두깨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붓을 꺾으면 숙제를 줄 곳도 없으련만 무슨 부귀영화에 입신양명을 보리라고 여태 뭉그적거리고 있다. 나 같은 부류 탓에 활자의 강은 범람하는 것이다.
가끔 외양간을 나와 오솔길로 들어선다. 칠불암 가는 길엔 제주할망의 허름한 주막이 있다. 탐라바당에서 구쟁기 생복 잡으며 숨비소리 내뿜다가 단체로 경주바당에 원정 와 홀로 눌러앉은 잠녀 아지망이, 물질이 숨찰 나이에 '다라횟집' 벌였다가 그 짓도 세월에 밀려 남산기슭에 자리잡은 퇴역 잠녀 할망이다. 간판도, 신고증도 없고, 할방이 먼저 가니 굴뚝도 무너지고, 나무의자 못대가리는 바지를 찢고, 엉덩이를 찌르고 삐걱거리지만, 얼큰한 냄비칼국수, 독특한 겉절이 맛, 주는 대로 받는 식대, 쇳조각인지 쇠소깍인지 상전의 딸과 머슴의 아들 간에 얽힌 슬픈 사랑의 전설을 경주·제주 사투리로 섞어 엮는 걸쭉한 입담은 갈 때마다 들어도 새삼스러운 술안주다. 알아듣지도 못할 잠녀타령, 원정은 과수댁 잠녀가 바위틈에서 물옷 갈아입다 홀아비 어부에게 들킨 끝에 정분나 눌러앉은 자신의 팔자타령까지 돔배돈우육, 물도새기무침에 곁들이면 그날 귀갓길 내 자전거 바퀴는 흥에 겨워 춤을 춘다. 인적 드문 오솔길 주변에 의외로 진솔한 삶들이, 맛깔나는 제재들이 네잎클로버처럼 숨어 있다. 진실로 내 '글방'은 외양간 바깥세상이다.
수필 향기는 수필가 숫자만큼 다양하다. 수필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맛과 향기를 풍기면 그것으로 만족하다. 호불호 취사선택은 벌 나비 독자의 몫이 아닌가. 내 외양간에서 태어나 출가한 아이들은 과연 어떤 냄새였을까?
바깥 글방에서 돌아오니 외양간 바닥이 멀끔하다. 동분서주 쏘다니며 애면글면 필사, 복사, 빌려다가 발 디딜 틈 없이 널어놓은 긴요한 자료들이 몽땅 사라져버린 것이다. 동무들이 황토방 구경 좀 하자고 조르길래 대충 치우고 차 한 잔 마셨다며 책은 책더미에, '종이쪼라기'들은 아궁이에 들어가 있으니 필요하면 끄집어내 쓰던지, 아니면 불쏘시개 하라며 뭐가 잘못됐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적반하장이다. 오, 저 문외한!
안채 주인 사임당 권 씨가 내 황토방을 시앗처럼 괄시하며 언필칭 외양간이라 매도하는 것으로 보아 혹시 퇴계退溪 선생 후처 권 씨의 일족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장모 생신날, 처녀 때 살던 옛 집에 따라가면 그 집안 족보를 좀 거슬러 올라가봐야겠다. 제사상에 굴러떨어진 배를 치마 속에 날름 감춘다거나, 흰 두루마기에 붉은 천을 덧대 기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지경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