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오해 / 반숙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선발대는 모두 짝을 맞춰 산행을 시작했는데 어깨에 큼지막한 가방을 사선으로 메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그 남자만 눈을 깜박거리며 혼자 남았다. 턱밑으로 몇 가닥 수염이 성긴 옥수수 수염모양 나부끼고 숱 없는 긴 머리를 동여맨 것이 꼬랑지처럼 등산모 밑으로 매달려 있다. 얼굴이 창백하다.

 오늘은 흰 지팡이의 날이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시각장애인들이 모처럼 나들이를 하여 자연을 벗삼아 산행을 하고 정상인과 장애인이 하나가 되어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한옆에서 그 남자를 지켜보다가 다가서며 "저랑 가실래요?"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오치요오"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자국을 떼었다. 비실거렸다. 이렇게 짝이 된 우리는 먼저 간 사람들을 따라 맨발숲길로 들어섰다. 오른팔로 그의 왼팔을 잡았다. ​

 "여기는 맨발숲길인데요. 구두를 벗으실래요?"

 "아니요, 그냥 갈랍니다."

 장돌, 둥근돌, 모난 돌밭을 골고루 밟으며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곳에 이르렀다. 등에 땀이 촉촉이 배어들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코끝을 씰룩거렸다.

 "향기가 나는데요?"

 "야생화 꽃밭을 지나고 있어요."

 그의 얼굴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초롱처럼 생긴 섬초롱꽃과 마가렛꽃의 청초함이며 천리향의 자태도 빼놓지 않았다. 언덕이 있다고, 길이 좁아진다고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에 대해 설명을 해주자 자신의 지나온 삶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사고로 실명하고 부모님의 애물단지로 살아온 이야기며 현재 형제들은 객지에 나가서 살고 어머니와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이다. 그 몸으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물었더니 봄철에는 이웃들이 기계로 논을 갈아 주고 모심고 제는 일도 자원봉사자들이 다 도와 준다면서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이 없다. 다만 마음이 늘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혼자소리를 하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천안을 데려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천안에는 두 번 간 일이 있는데 그 여자가 거기 다방에 근무하며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가면 아예 집으로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할 작정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답을 유보했다.

 갈림길에 올랐다. 오던 길로 곧장 올라가면 산의 정상이고 오른쪽으로 굽어 내리면 출발했던 장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어쩌실래요?"

 그는 조금 전에 한 말의 여운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듯 주춤거리다가 조금 더 올라가자고 했다.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쯤이었다. 사뭇 뒤따라오던 확성기 노랫소리가 끊기고 새소리 물소리도 딱 끊겼다. 공기층에도 불가청 층이 있는지 깊은 고요가 엄습했다. 그가 멈췄다. 나도 멈췄다. 흰 지팡이는 몸에 기대 세워 두고 바람을 온몸으로 감지하듯 가만히 섰다. 나도 말을 잃어버린 듯 산의 푸른 정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숲의 싱그러움이 그의 가슴에도 기별을 했는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 있었건만…"

 눈을 깜박이며 부르는 '고향무정'의 가락이 골짜기에 반향하며 그의 수염에 햇빛무늬를 던졌다. 목청이 좋았다.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칭찬에 신이 났는지 그는 '충청도 아줌마'를 다시 불렀다. 창백하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는 조심스럽던 발걸음은 어디 가고 지팡이도 힘차게 앞으로 걷고 있다. 그는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이 이야기 보따리를 쉴새없이 풀어놓았다. 상대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안중에도 없다. 특히 눈만 보이지 않을 뿐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는 것과 안마 기술을 배워 식구 하나는 호강을 시킬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내림 길은 속도가 붙었다. 점점 확성이 노랫소리에 섞여 사람들 이야기 소리가 가까워지고 음식 냄새가 피어 올랐다. 이제 구름다리 하나만 건너면 행사장이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 분명 천안에 언제 데려다 주려느냐고 다짐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때 땀이 배인 팔을 풀며 아주 은근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댁은 결혼을 하셨는지요?"

 "……"

 그를 식탁에 앉혀 놓고 냇가로 내려가서 손을 씻었다. 이마에 밴 땀도 닦았다. 그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리고는 그와 되도록 멀리 떨어진 식탁에 앉았다. 그 사이 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 앞에도 국이 놓였다. 수저를 들고 마악 한 수저를 뜨는데 옆에 앉은 분이 눈을 멀겋게 뜨고 묻는 것이었다. ​

 "댁은 언제부터 그렇게 되셨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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