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로 빨간 도장이 찍힌 독촉장이 날라 왔다. 발신이 농협이다. 농협에서 대출받은 일이 없는데 이게 뭐지. 속 내용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높새바람에 기온이 높아지고 건조해지듯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마음이 바싹 타들어 갔다.
모임을 같이하는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왔다. 양손을 비비며 말을 꺼낼듯하면서 우물쭈물 뜸을 들인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그때야 미안하다며 가시나무를 더듬듯 이야기를 힘들게 시작한다. 아내가 양품점을 하다가 식료품 가게를 하고 싶어 하는데, 마침 좋은 자리가 나서 임대를 하려니 가진 돈이 모자란단다. 대출을 받으려면 보증 두 사람이 필요해서 부탁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군청에 운전기사로 근무하고 있지만, 고향이 아니라서 우리 모임 친구 말고는 특별히 친한 사람이 없다. 내키지 않았지만 야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인감도장과 신분증을 주었다.
내 업무가 야외교육 등으로 사무실 차량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운전기사였던 그 친구와 동행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그 가족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었다.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집과 그 집 아이들의 나이가 비슷해서 서로 놀러 가고 오며 친해졌기 때문이다. 아내도 부인이 하는 양품점에서 아이들 옷을 일부러 사주기도 하며 각별하게 지냈다.
그 친구 부인은 공주가 고향으로 교대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방학을 맞아 대구에 사는 여동생 집에 놀러 왔다가 집주인 아들인 그 친구와 눈이 맞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구안와사 후유증으로 입이 똑바르지 못한 것도 연애 시절에 몰랐을 정도로 콩깍지가 씌었었다고 했었다.
독촉장을 받고 보증을 선 두 사람이 그 친구를 불렀다. 그 친구는 고개를 푹 숙여 미안하다고 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동안 식료품 가게가 전망이 있을 것 같아 본래 하던 양품점을 정리하고 도로변 목 좋은 곳의 점포를 건물주와 계약하였단다. 중도금까지 치른 상태였는데 건물주는 그 건물을 몰래 팔아 버리고 야반도주를 해버려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이런 형편이니 대출금 원금상환은커녕 이자에 이자가 눈덩이같이 불어나 애초 대출금의 두 배가 넘었다고 했다.
이튿날 새 건물주를 만나 딱하게 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농협 담당자에게 대출금과 이자를 세 사람이 나누어 갚기로 했으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즉시 송금을 했다.
대출금 보증 관련은 그렇게 정리하고 잊고 지내고 있는데 다시 또 독촉장이 날아왔다.. 곧바로 농협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보증을 선 우리 두 사람은 돈을 보내왔는데, 정작 대출한 그 친구가 송금하지 않아 아직 남았다고 했다. 다시 그 친구를 만났다. 식료품 가게 재료 구매 등으로 운영비로 허둥대느라 송금하지 못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대추 벌에 쏘인 양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은 보증인인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완납하였다.
그날 이후부터 대구로 퇴근하면서 채소 등 식자재를 그 친구 가게에서 샀다. 부인은 고맙다며 열심히 벌어서 갚겠노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어느 날 함께 보증 서준 친구가 식료품을 납품하는 학교에 압류해서 대납한 자기 돈을 받고 있으니 나 보고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목을 죄면 그 친구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으니 난 갚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 생각은 좋지만, 그 친구네 가보면 절약은 고사하고 우리보다 더 펑펑 쓰며 살고 있으니 돈 받기는 글렀다며 잘 판단하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양심을 믿고 기다릴 것이며, 만약 야반도주한다면 미안하다는 전화 한 번만 주면 그것으로 상쇄하고 말겠다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얼마간 지난 어느 날, 압류해서 돈을 받는 친구가 날 찾아왔다.
“내 말 좀 듣지, 그 친구 야반도주했어.”
난, 그래도 압류로 얼추 받았다며 자기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그래, 결국 그렇게 하였구나. 아니 나라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고온 건조한 높새바람처럼 아픔을 주고 야반도주한 지가 어언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쯤 나를 기억이나 할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늬바람에 곡식이 여물 듯 잘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