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기로 말하면 대리석만 한 게 또 없을 것이다. 대리석은 땅 속에 묻혀 있던 석회암이 높은 온도와 강한 압력에 의해 약한 지층을 뚫고 나와 굳어진 변성암의 일종이다.
‘대리석’이라는 명칭은 중국 ‘대리’지역에서 생산된 암석에서 연유된다. 설마 고열에 녹은 석회성분이 굳어져 대리석이 되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렇다면 다비식을 마친 스님의 사리도 긴 시간 시나브로 굳어지면 대리석처럼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다.
지구의 겉을 구성하는 암석권이 약 100km쯤 된다고 한다. 그 판이 연약권 층과 맞물려 움직이며 상대 운동 방향과 속도에 따라 물리적 혹은 화학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운동으로 인해 지구 내에 맨틀이 움직이면서 지표면의 생물체들이 땅속으로 묻히기도 하고 땅 속의 뜨거운 물체가 솟아나 새로운 형태의 지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리석의 단단함도 긴 시간의 흐름이 움켜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움켜쥔 흐름이 한순간이라도 놓아버렸더라면 대리석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흐름이 움켜쥐고 있던 현상을 ‘흐름의 악력握力’이라 이름 붙인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 6천만년이라 산출해 냈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백 년으로 볼 때, 지구의 나이는 무한의 흐름이나 다름이 없다. 무한의 흐름 속에서 모든 물체가 생성하고 소멸해 왔다.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에도 우주에는 측정할 수 없는 억겁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었다. 23.5도 기울기로 자전과 공전하는 지구를 계절로 나누고 시간으로 쪼개고 또 분초로 세분화한 것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것들이다.
‘질 들뢰즈’는 『생성존재론』에서 ‘시간이란 흐름 속에 새로운 것이 무수히 나타나며 예단할 수 없는 비결정성이 깃드는 존재’라고 했다. 지금도 무한의 흐름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지구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이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정 기간 흐름이 움켜쥐었던 대리석도 시나브로 분해될 것이 분명하다. 단단한 대리석도 다른 물체에 비해 시나브로 분해되겠지만 변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내 생을 뒤돌아본다. 나에게 필요했던 의식주도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음식의 가짓수는 말할 수 없고, 맛의 변천사 또한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 나의 육신과 영혼도 팔십 년이란 흐름 속에서 조금씩 지속 성장해 왔고 늙어 가는 중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가는 삶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변해가고 있다.
내가 형체를 갖추고 살아있는 것도 무한의 흐름이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흐름이란 나의 존재를 의미하며 그 흐름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형체를 갖춘 형상들도 흐름이 쥐고 있던 힘을 빼버리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형체를 잃어버릴 게 빤하다.
결국 내 육신도 내 나이만큼 긴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 흐름이 나를 붙잡아주고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중에도 단명한 사람과 오래 산 사람과 차이가 있다면 주변의 현상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느꼈느냐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무한의 흐름 속에 오래 머물고 싶다. 언제 소멸될지 모르는 생명인데도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나 느낌이 문자화 되기 이전의 정황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 감정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