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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마을에 들다 박금아

 

흙냄새가 났다짭조름한 내음도 났다.

어머니 손을 잡고 마을에 하나뿐인 화실로 처음 그림을 배우러 가는 어린 샤갈과 눈이 마주쳤다낯선 거리 풍경이 들어왔다세탁부와 굴뚝 청소부가 사는 집을 지나고아내가 파는 브랜디를 몰래 마시고 늘 말처럼 '히힝거리는 마차 아저씨 집을 지나 샤갈의 집에 닿았다그의 아버지가 예언자 엘리야가 올 수 있도록 늘 열어두라던 대문은 열려 있었다동생 다비드가 켜는 만돌린 소리 속으로 <할머니>(no.4)의 나지막한 기도가 섞여들고청어 상점에서 인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no.1)가 청어의 비린내를 씻어내는 목욕물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빛의 색채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는 사라졌다채색화는 몇 점에 불과했고무채색의 삽화들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걸려 있었다무명 커튼 뒤로 드리워진 음영이랄까채화彩畵와도 같이 화려했을 줄로 여겼던 한 예술가의 내면이 잿빛 실루엣으로 일렁이고 있었다색깔을 입지 않고 선이나 면으로만 표현된 이미지들에서 진솔함이 묻어났다. 7월의 어느 뜨거운 아침나는 예술의 전당 마당을 가로질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무채색 삽화들 사이에서 채색화 한 점이 눈에 띄었다. <비테프스크 위에서>라는 그림이다유대교 회당이 서 있는 마을 위로 지팡이를 들고 자루를 멘 한 남자가 하늘을 떠다니고 있다. '루프트멘슈', 돈이 없고 발붙일 땅이 없어 공중에서 공기만 먹고사는 사람이다조국을 잃고 방랑하는 유대인을 상징한다는 해설을 듣는 순간그가 샤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테프스크라는 러시아 당국이 지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다른 곳으로 가려면 허가증이 필요했다작고 폐쇄적인 마을과 학교에서 겪는 반유대주의는 샤갈로 하여금 이향離鄕을 꿈꾸게 했을 것이다샤갈은 더 살았다가는 몸에 이끼가 낄 것 같다며 고향을 떠났다그 후 두 번 방문하는데 다시 찾은 고향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다돌아온 탕아처럼 그는 비테프스크를 온전히 사랑하기 시작했다.

"비테프스크는 독특한 고입니다이상한 마을우울한 마을지루한 마을입니다젊은 여성들이 넘쳐났지만 나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어요수십수백 채의 유대교 예배당과 사람들이 즐비한 거리여기가 러시아가 맞을까요나는 비테프스크가 오직 나만의 마을내 것임을 깨달았습니다나는 감격하여 돌아왔습니다." 나의 인생 My Life119

그의 영원한 뮤즈이자 모델이었던 첫 번째 아내벨라(Bella Rosenfeld Chagall)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향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첫눈에 빠져들었다꿈과 재능을 오직 샤갈을 위해 바친 벨라는 그때 이미 샤갈의 눈을 읽었던 것 같다.

"두 눈은 뚝뚝 떨어져 있어서 작은 보트처럼 제각각 항해를 하는 것 같았어요."

벨라의 회상대로 샤갈의 두 눈은 각각 늘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자신이 있는 공간과 고향 비테프스크현실과 이상 사이의 항해였을 수도 있겠다.

'no.17'이라는 제목을 단 <자화상앞에 멈췄다샤갈의 얼굴 위로 고향 집이 있고상반신에는 부모님과 아내와 딸이 그려져 있다. 36세 때 그렸지만 평생의 예술세계를 예언하는 작품이 되었다샤갈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들은 다 고향에서 나왔다부모님과 사람들사람과 동물을 사랑하는 하시디즘 역시 그랬다그는 러시아를 떠나 독일과 프랑스미국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며 유랑민으로 사는 동안 비테프스크를 인호처럼 새겼고 작품에 담았다.

위안이었다나는 아직도 고향 '신섬'을 뛰어다니는 새벽꿈을 꾼다해넘이께면 섬 앞바다에 내리던 황혼이 떠오르곤 한다고향을 떠나온지 50년이 지났지만시간이 흐를수록 내 영혼은 고향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글을 쓸 때면 더욱 그렇다나의 펜 끝은 무시로 고향에 닿았다그런 이유로 소재 빈곤과 유년이 머물러 있을지도 모를 문학적 한계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샤갈을 만나고부터 더는 '신섬'을 한계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오히려 영감의 뿌리가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스무 살에 꿈을 위해 삼등칸 열차에 몸을 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던 샤갈처럼나는 여섯 살 때 공부를 위해 도선을 타고 섬을 떠나 뭍으로 왔다.

섬에서 더 멀어지고 싶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 동생을 남겨둔 채 서울로 유학을 와버렸다도시에서 떠돌이로 사는 동안 잊다시피 했다언제부터인가 '신섬이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가끔은 생명 대신 주검을 띄워 올리고 선한 사람들의 절규조차 삼켜버리던 비정했던 고향 바다가그래도 다시 바다로 가던 고향 사람들의 모진 삶이 새록새록 그리워졌다나의 첫발자국도 섬길 어딘가에 한 장의 삽화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그곳에서는 원형의 나를 무한정 복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갈에서처럼내 소중한 것들도 고향에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 배움도 신섬 사람들이 믿었던 원시 신앙에서 받은 것이었다인간은 약하기에 돕고 살아야 하며돌과 나무에도 영혼이 있어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들이었다버림을 받고도 신섬은 내게 제속의 것을 쉼 없이 내어주었다아홉 남매의 맏이이면서도 집안의 무거운 짐을 아버지에게 다 맡기고 떠난 샤갈도 그랬을까미안했다떠나 온 이상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고향으로부터 받은 것은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았다적게나마 나누고 싶었다그것이 내 작은 문학의 시작이었다.

고향을 되새김질하는 샤갈을 두고 피카소는 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빈정댔다가 결별하고 만다반유대주의는 두려운 실체로 남았을 것이다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헀고그곳의 노인과 랍비떠돌이 같은 가난한 유대인을 그렸다. 자신을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고향에 뿌리를 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보듬는다는 뜻 아닐까.

샤갈의 삽화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책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끼워 넣은 밑그림 정도로 여기던 것을온전한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아무리 작은 삶도 다른 삶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그 자체로 최선이라는 깨우침이었다무채색의 시간은 화려하게 채색되기 전에 겸손되이 존재하는 필연의 시간이며고향은 누구에게나 샤갈의 삽화처럼 무채색의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발견도 새로운 눈뜸이었다.

꽃이 필 때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고 한다샤갈의 삽화들은 어려웠던 시기에 힘을 얻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다그는 손에 석판이나 구리판을 쥘 때 부적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으며모든 기쁨과 슬픔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실제로 샤갈은 삽화들과 함께 '큰 걸음'이라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크고 화려한 꽃으로 피어났다.

샤갈은 98세 되던 해인 1985년 3월 어느 저녁에 생폴드방스의 화실에서 눈을 감았다세상을 떠나기 전날에 그린 그 그림에는 등에 날개를 단 한 남자가 캔버스 앞에 앉아서 연인을 그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그림 속 화가는 샤갈이고연인은 자신과 벨라였을 것이다그 마지막 그림의 제목이 <또 다른 빛을 향하여였다는 것을 안 순간나는 그를 예언자로 확신했다성인들처럼 죽지 않고 살아서 그리다 만 사랑의 붓칠 작업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했던 샤갈그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러시아 혁명과 반유대주의를 겪는 순간에도 고향을 사랑했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세상을 향한 보편적 사랑으로 승화시켜 열정적으로 그려냈다그리고 그의 친구가 말한 대로이 세상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닳아 없어지듯이 사라졌다.

작별의 인사였을까고향을 향한 샤갈의 고백이 들려왔다.

"나의 고향 비테프스크야비록 지금 나는 너를 떠나 있지만 내 작품에 너와의 기쁘고도 슬펐던 추억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단 한 번도 없었단다."

자신의 생애에는 단 한 명의 스승도 없었다던 샤갈비테프스크야말로 샤갈의 유일한 스승이 아니었을까내게 신섬이 그렇듯이전시장을 찾았을 때 느껴지던 짠 내음은 내 고향 신섬의 냄새였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러시아 비테프스크 출신의 유대계 프랑스 화가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초적 향수와 동경꿈과 사랑종교를 주제로 한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회화와 조각판화테피스트리무대 디자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종합예술가로 활동했으며파블로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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