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미소 짓고 있다. 웃는 것인지 애수에 잠긴 표정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모나리자의 미소다.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빛나는 눈동자. 야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설보다 더 애절한 이야기. 차분히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그 여성의 슬픈 눈동자는 괜스레 내 가슴을 울리고 있다.
가시밭 인생길이 아무리 험하다 한들 이 사람에 비할까. 가끔 보는 ‘아침 마당’에 출연한 그 여자의 삶은 한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시골에 사는 순박한 14살 소녀 김복동은 일본 공장에 가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모집 꾼의 꼬임에 먼 길을 떠났다. 헤어질 때 어머니는 배고플 적에 쓰라고 일원을 치맛말기에 넣어 꿰매 주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온 여자애들을 실은 차는 일본에 가지 않고 중국 땅 광둥으로 갔다. 그녀가 그곳에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밀려오는 일본군에게 짓밟히는 일이었다. 이슬 맺힌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군화 발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누가 빼앗긴 열네 살 소녀의 봄날을 되찾아 준단 말인가. 수많은 야수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녀들은 기진맥진하여 일어날 힘조차 없었단다. 겨우 정신을 차려 피로 물든 치마를 빨면서 만나게 된 같은 처지의 여자애들. 수치심과 공포로 피맺힌 울음을 토하며 몸부림쳤다. 세 명의 소녀들은 김복동 어머니가 준 돈으로 약을 사 먹고 죽으려고 했다. 청소하는 중국 여인에게 손짓 발짓으로 먹고 쓰러지는 것을 사오라고 했더니 술을 사왔단다. 그네들은 죽는 약인 줄 알고 독한 술을 마시고 그대로 쓰러졌다. 모진 목숨이 이틀 만에 깨어났다. 가엾은 여자애들은 날마다 일본군에게 유린당하며 죽지 못해 살아갔다. 전쟁터가 이동할 때마다 홍콩, 인도네시아까지 짐짝처럼 실려가 그들에게 만행을 당했다. 7년 동안이나 짐승보다 못한 성 노예로 끌려다니다가 싱가포르에서 고국의 해방 소식을 듣고 풀려나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인생의 모진 칼바람을 뒤로한 채, 그 상처를 드러내고 아물게 하려고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해쳐온 삶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장에서 김 할머니는 박 대통령이 같은 여자로서, 위안부 문제를 꼭 해결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단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피 울음으로 세월을 보낸 탓인지 이제는 눈물이 말라버렸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역사의 산 증인으로부터 일본의 만행을 직접 들으니 너무도 처참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분이 끓어올랐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역사의 진실을 거부하고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일본의 행태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꽃다운 나이에 여성의 존엄성을 짓밟히고 청춘을 빼앗긴 위안부 피해자들이 현존하고 있다. 요즘으로 따진다면 고작 여중·고생이 그런 끔찍한 성폭력을 당한 것이다. 천인공노할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정리는 진즉 끝냈어야 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유대인이 나치의 잔악상을 고발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제작하여 세계에 알리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정부는 일찍이 이스라엘과 전쟁피해를 준 나라에 거듭 사과했다. 또한, 다시는 그런 잔인한 민족학살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국민들에게도 역사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단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부라면 최소한 가질 수 있는 양심이라 할 것이다.
독일과 다르게 일본은 반성은커녕 망언을 일삼고 있다. 며칠 전에 일본정부는 ‘고노 담화 검증’이라는 미명아래 위안부가 실제 있었는지 조사한다고 발표했다. 1992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우리 정부에 신고했다. 그때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주 일본 대사관 앞에서 피해자들이 수요 집회를 열어 갔다. 처음엔 부끄러워 집회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던 할머니들이 차츰 용기를 내어 참가했는데, 나중에는 이백여 명이나 모였다. 그들은 나오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 몫까지 대신하여 자신들의 억울함을 세상에 호소했다. 그제야 일본정부는 자체조사를 한 뒤, 관방장관이 1993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최초로 공식 표명하는‘고노 담화’를 발표했었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오늘날 우경화 아베 정권은 그 담화를 검증한단다. 아니 김복동 씨처럼 산 증인들이 있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단 더 말인가?
‘위안부’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히 우리 역사의 일부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이들에게 미래란 없다. 반드시 기억하고 역사의 아픔을 해결해야 한다. 무척 늦은 감이 있으나 2014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이 사죄와 보상’을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정부 대응은 몸과 맘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온 그녀들에 대한 조국의 최소한 예의와 배려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도 유대인처럼 일본의 끔찍한 만행을 세계만방에 좀 더 빨리 알렸어야 했다. 우리 정부가 유엔에서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자, 교활한 일본정부는 며칠 뒤 ‘고노 담화’ 수정은 없다고 말 바꾸기를 하며 국제사회 여론을 탐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힘없는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집단 성폭력을 감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국, 중국, 동남아 등 피해국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인권 문제이기에, 일본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소망은 소박하다. 일본정부의 사과와 보상이다. 일본은 지금이라도 피멍 든 여인들의 한을 풀어주는 인도주의적 사과를 하고. 보상하는 일이 그녀들의 빼앗긴 봄날에 한 줄기 햇살을 비춰주는 일이리라. 김복동 씨는 해방 뒤 고국에 돌아와서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양심상 할 수 없어, 홀로 살면서 모은 돈으로 소외된 약자를 도와주었다. 김 할머니는 지금은 돈도 필요 없단다. 피해보상을 받으면 성 피해 여성을 돕는 나비기금으로 내겠다고 했다.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와 모든 여성이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의미란다. 최근에는 이 나비가 우리나라를 넘어 전쟁 중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향해 콩고와 베트남까지 날아가고 있다.
움츠리고 있던 상처 많은 애벌레 김복동의 소녀 시절.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라는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나라가 힘이 약해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 시간을 악몽으로 접어놓고. 뒤늦게나마 두꺼운 번데기를 깨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김복동 할머니의 나눔 날갯짓. 구멍 뚫린 나비의 비상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