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박달나무 / 장돈식

 

 

 

이른 아침, 마당가를 스치는 개울가에 시야(視野)가득,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 산골에서도 희귀한 ‘나도박달나무’다. 산중에서는 여름 짙푸른 잎도 좋지만 만산(滿山)한 가을의 단풍 중에서도 이 ‘나도박달나무’는 가히 압권(壓卷)이다. 세상에 하 많은 사람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인 것처럼, 가을에 단풍이 많아도 나는 이 나무를 편애하는 것 같다.

산골 사람들은 ‘북자기’ 또는 ‘복자개’라고 한다. 사전을 들춰보니 표준 이름은 ‘나도박달나무’ 라고 했다. 단풍나무 과에 딸린 큰 키 나무, 암수 딴 그루로 5월에 꽃이 피고, 날개 열매는 9월에 익고, 산 숲에 자란다고 쓰여있다. 내 집 ‘나도박달나무’는 봄에 피우는 꽃에서 뿜어내는 사랑의 꽃가루를 보아 수나무가 확실한데 사랑을 나눌 암나무가 근처에 없으니 홀아비다. 짝을 잃은 카나리아의 우는소리가 더 아름답다던가, 그래서 이 나무는 가을에 더 열정적으로 단풍을 불태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월요일 오후, 뜨락을 내려서는데 갑자기 눈이 부시다. 서녘으로 기운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복자기. 8미터쯤 높이의 나무를 휩싸고 있는 잎이 붉게 물들어 흡사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다. 여느 단풍의 핏빛 빨강이 아니다. 백제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옛날 어느 임금이 썼을 것이라는 면류관의 불꽃 문양 장식을 확대하면 이랬을까, 그 빛깔에다 용광로에서 쏟아 내는 등황색(橙黃色)의 쇳물색을 합치면 이럴까. 호흡은 멎는 듯,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이 들면 눈물주머니의 아귀도 느슨해지는지 어쭙잖은 감동에도 괜스레 눈물이 핑 돈다.

그날 저녁, 좀 피곤하기에 잠을 청해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다. 몇 시나 되었는지 창이 환하다. 방에 든 달빛에 깜짝 놀라 일어나니 밤 12시, 음력 열나흘 달이 밝다. 산중의 기온은 이미 초겨울이다. 주섬주섬 옷을 두터이 끼어 입고 흡사 몽유병 환자가 되어 뜨락에 내려선다. 어슴푸레한 실루엣의 산을 배경으로 한 부드러운 윤곽, 달빛 아래 보는 ‘나도박달’은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다. 낮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자태로 거기에 서 있다. 밝게 찍은 흑백영화의 한 컷처럼 환상적이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박주(薄酒) 한 병, 나물 한 접시를 들고 나온다. 잔디밭 한가운데 놓인 한 평이나 되는 정원석(庭園石) 너럭바위에다 술과 안주를 놓고, 마당 가에 자라는 싸리나무를 꺾어 반으로 접으니 젓가락이다.

성근 잔디밭에 앉으니 엉덩이로 느끼는 싸늘한 지온(地溫)이 오늘은 싫지가 않다. 한 잔 따라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워서 개울 건너 의젓이 서 있는 이 녀석에게 “자네도 한 잔 하게. 좋은 밤 아닌가.” 인생의 겨울을 사는 촌로(村老)가 늦가을에 접어든 ‘복자기’에게 술을 권한다.

“노인장! 고맙습니다. 주시는 잔이니 받겠습니다.” 나무 대신 내가 답하고는 잔을 들이킨다.

작년부터이다. 문우(文友)들에게 이 나무의 단풍을 자랑했다. 어김없이 오마던 그들은 소식이 감감하다. 이 어려운 때, 님들이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이 오시리. 아쉽지만 외로이 나무와 대작하며, 거푸 마시는 술기운이 오른다. 자연과 너무 먼 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詩)한 수,

 

삼경(三更)에 월출(月出)하니 죽창(竹窓)에 송영(松影)이라

앞 산(山)에 어리는 빛 지금에 더욱 좋아 묻노라

 

흥진취객(紅塵醉客)들은 자는가 깨었는가

영종조(英宗朝)의 가인(歌人) 송계연월옹(松烓煙月翁)은 이렇게 읊었다.

이틀이 지났다. 엊저녁에는 늦가을 비가 추적이더니 아침에 개이며 소리 내어 흐르는 개울에서는 안개가 피어오른다. 2층 서재에서 바라보는 나의 ‘복자기’, 안개 뒤에 도인(道人)처럼 서 있는 것이 정겹다. 유행의 노랫말이 때로 가슴에 이는 상념들을 간추려주는 때가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항간에 불리는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의 첫 대목이 그렇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11년 전 입산(入山)무렵, 산방에서 상류(上流)쪽에 가을이면 유난히 화려한 단풍 무더기가 보였다. 잡목 숲을 헤집고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어느 초동(樵童)이 서까래 굵기의 ‘나도박달나무’를 잘라갔고, 나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루터기에서 새순을 수북히 돋우던 게 이 나무다. 본래처럼 한 줄기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있으나 한 번에 정리하면 우듬지와 뿌리의 균형을 잃을 염려가 있어, 몇 해에 걸쳐 한 해에 한 가지씩 잘라내어 지금은 네 가지가 남았다. 이 복자기는 3년 후면 외줄기가 된다. 빨리 그날이 보고 싶다.

어쩌다 만나는 친구들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내가 딱하다는 듯 ‘무어라도 소일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소.’ 하기도 한다. 네 산 내 산 가리지 않고 봄이면 이렇게 둘레의 나무들을 다듬고, 해로운 넝쿨을 걷는다. 뜰 가까이 있는 산목련의 자세를 고쳐 주고, 빈자리엔 단풍묘목을 심기도 한다. 겨울 들어서는, 굶주리는 산짐승과 산새들의 먹이를 져 나르다 보면 하루, 한 달, 한 해가 덧없다. 몸도 마음도 턱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건만, 그들이 이런 걸 일이라고 여기랴. 대답이 궁한 나는 먼 산만 바라보며 웃을 뿐이다.

그래서 내 진실한 벗들은 이 산의 나무들이다. 공들인 산방(山房)이 도로공사에 무참히 헐리고, 애써 가꾼 나무들이 포클레인에 짓이겨질 때의 그 허전한 나의 마음을 ‘나도박달나무’는 알고 있다. 그 후, 이 나무를 의지 삼아 산방을 그 앞으로 옮겼다. 나무는 유신(有信)하여 저렇게 단풍을 피워 이 가을이 살만했다.

후일에 이곳을 찾는 이가 있어,

“달이 밝던 밤에 나에게 잔을 권하던 노인은 어디 갔소?”

묻는 이 녀석에게,

“이 방그러니 계곡을 그지없이 사랑하던 그 노인,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요.”

일러 줄 사람이라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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