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 최장순

 

 

후드득 날개를 접는 백로들. 화들짝 깨어난 천변이 소란스럽다. 내가 앉은 곳까지 물살이 퍼진다. 가느다란 발을 따라 동그라미가 옮겨간다. 걸음이 만드는 수많은 파문을 재빨리 화면에 담는다. 나를 주시한 예민한 날개들이 셔터 소리에 놀라 다시 공중으로 흩어진다. 수면이 저 혼자 흔들린다.

 

물을 터전으로 삼는 것들에겐 어쩔 수 없이 파문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행보의 증명일 뿐이다. 걸음

이 사라지면 어느덧 파문도 가라앉는다. 고요한 물 위에 실핏줄처럼 번져가는 소금쟁이의 작은 파문이든, 제 무게를 못 이겨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든, 백로가 머물다 날아 가버린 수면처럼 말이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항상성恒常性이다.

 

파문의 뒤끝은 사람들에게 있다. 앙금이 갈댓잎처럼 아픈 기억을 서걱거리기도 한다. 찻잔 속 파문과 달리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어느 날 불쑥 튀어나와 뒤통수를 치거나 발목을 움켜잡는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파문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파괴, 파멸, 파산, 파벌 같은 말은 비수를 감춘 두려움이다. 파문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문, 텔레비전, SNS는 이들의 매개체다. 스마트폰, 컴퓨터,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감시자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저장고는 이들의 은신처다. 고성능 안전장치도 무화시키는 강한 폭발성으로 제 발등을 찍지 않으려면, 파문의 생산, 유통, 저장에 신중해야 한다.

 

말은 파문의 진원지이다. 마음의 출구이자 문제의 시작이다. 말이 글이나 행동보다 앞질러 가는 것은 그만

큼 익숙하고 쉬워서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뱉은 말이 소멸이 되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음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을 떠난 화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 말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거나 품위 있는 인간이 되게도 한다. 상처 난 과녁에 박혀 고통을 주거나 감동의 과녁에 명중되어 기쁨을 주거나 하니까 말이다. 말의 타락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홀로 삭이지 못해 고통을 받다 끝내 목숨을 버리는 비극을 보면서도 무감각해지는 일상이다.

 

히틀러의 연설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집권 25년간 그는 말로써 군중을 사로잡았다. 과장된 몸짓과 눈 부릅뜬 표정에 동원된 횃불과 서치라이트 불빛, 그리고 웅장한 음악이 그의 위상을 치켜세웠다. 철저히 계산된 무대장치 속에서 그는 카리스마가 넘쳐 보였다. 그러나 그가 뱉은 말은 참혹한 파문을 낳았다. 말에 현혹된 군중들은 광적인 나치 신봉자가 되었고 히틀러의 배후가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말에서 소리가 사라지면 어떨까,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음이 소거된 히틀러는 우스꽝스러운 풍선 인형일 뿐이었다.

 

말이 곧 행위인 정치가들, 그들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편 가르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수법이다. ‘누가 한 말이냐’가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내 편이 아니면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일단 부정부터 해버린다. 제 울타리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들이 진실이다.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는 타락한 말의 파문들. 상처를 보듬을 너그러움은 점차 사라지는데, 칼끝을 밖으로 향한 파문은 뛰쳐나갈 기회를 엿본다. 무덤덤하게 넘기는 다수를 믿고 악성 바이러스처럼 위세를 떨친다. ‘참’이란, 사실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해 주는가에 달려있다. 사실, 진리, 옳고 그름이 사라진 ‘진리 이후post-truth’의 시대라는 말이 암울한 까닭이다.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으려면 귀찮아도 파문의 진원지를 찾아보고 어느 편에 이익이 되는지, 그것이 개인의 욕심인지, 공익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강 건너 불 보듯 방관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타락한 말의 파문이 언젠가는 나를 덮치기 때문이다.

 

어느새 사라진 물의 파문. 자연의 소멸은 아름답다. 수피水皮를 젓던 새들 날아간 천변이 고요해지듯 시끄럽게 흔들리는 안과 밖도 서서히 가라앉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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