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비 / 김영관

 

 

 

밤바람이 차가운 겨울 저녁이었다지인의 병문안을 갔다가 기차에서 내려 대합실을 빠져나와 버스 승강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한 여인이 다가왔다.

아저씨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집에 갈 차비 오천 원만.” 말꼬리가 길었다흠칫 살폈다초라해 보이는 중년 여인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발걸음을 늦추며 오른쪽 상의 주머니를 만지다 문득 엊그제 일이 떠올랐다.

친구들 모임에서였다한 친구가 말했다. ‘기차역에서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사정을 하는 낯선 여인에게 오천 원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가 같은 경험을 했다며 인상착의와 말투 등을 맞춰보곤 같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생각했다나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외면하리라고.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돈이 없습니다.” 그리곤 빠르게 지나쳤다그러나 승강장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곧이어 내가 나쁜 고정관념을 갖고 한 사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한 철면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승강장에 다다라 내가 탈 버스 안내 전광판을 확인했다오 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런 일에 이렇게 고민을 하다니나 자신을 나무라며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뛰다시피 좀 전에 여인을 만났던 장소로 갔다여인은 없었다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낙담했다먼 길 갔다 온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버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자 버스비에 얽힌 오래된 영상이 찍찍거리며 돌아갔다.

1968년 가을이었다제대 삼 개월이 지나도록 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그러다 친구 형의 소개로 주정酒精 공장에서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여섯 시 반에 집을 나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공장에서 하는 일은 하루 4~5차례 화물트럭이 싣고 오는 생고구마 포대를 창고로 옮기는 일이었다일꾼들은 나 말고 세 명이 더 있었다다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또는 아버지뻘이었다.

궂은비가 온종일 내린 다음 날이었다아침 일찍 버스비를 받기 위해 어머니께 손을 내밀었다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셨다어제종일 비가 내려 난전에서 채소를 팔지 못했다는 걸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주머니를 털었다겨우 아침 버스비는 가능했다.

만원 버스 안에서 눈을 감았지만 심란했다가난 업장을 어깨에 진 어머니가 성인이 된 자식의 손에 버스비를 쥐여주지 못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던 얼굴이 일렁이었다.

그날은 전날 비로 들어오지 못한 양을 채우느라 오전에 화물트럭이 평소보다 세 대나 더 들어왔다고구마 포대를 나르는데 그만큼 힘이 들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공장 구석진 곳으로 가서 지친 몸을 뉘었다그때 나처럼 도시락을 싸 오지 않은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힘을 낼 방법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주정이 완성되어 나오는 증류수실에 컵을 가지고 가면 일하는 사람이 증류수 반 컵을 준다는 것이었다그 증류수는 순도 99%의 알코올로 수돗물 3배만 희석하면 25도의 소주가 된다고 했다나는 희석 주 두 컵을 마신 힘으로 오후에는 고구마 포대를 수월하게 져 날을 수 있었다.

일을 마치자마자 땅거미가 슬금슬금 공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공장 정문을 나섰다하단동에서 서대신동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경사가 계속 이어졌다오래전부터 이름께나 나 있는 고개의 진면목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까마득한 집까지의 거리를 마음속으로 측정하는데평소 이용하던 버스가 듬성듬성 빈자리를 두고 두 대나 지나갔다고구마 포대에 지친 내 육신에 화력貨力의 피로가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 흰 포말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속옷은 이미 땀으로 다 젖었다고갯마루에 도착 펑퍼짐한 돌에 앉아 턱에 걸린 숨을 진정시키며 아래를 내려다봤다낙동강 물줄기 따라 이어지는 하단동의 네온사인 불빛이 가슴을 허하게 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도시의 밤거리를 내다보며 다짐했다다시는 나의 고정관념으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그리고 이 차가운 밤 버스비가 없어 걸어가는 사람이 없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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