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의 행복 / 손택수

 

 

근근이 살다보니 밥맛이 살아난다. 서너 가지 찬으로 요기를 하던 습관을 들인 뒤부터는 평소에 맛보지 않던 음식 한두 가지만 늘어도 그날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은 듯 만족감이 있다. 상차림을 만끽하기 우해 줄어든 찬에 집중을 하면서 감각들이 기민해진다. 눈과 혀로 단순화 되어있던 맛이 귀와 코를 동원하여 맛의 지평을 한껏 드넓고 입체적으로 만들 때, 나열된 가짓수의 생략은 만찬이 일상인 자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으로 나를 도약케 한다. 이 고소한 쾌락이 산해진미를 찾아 도로를 질주하던 시절의 요란한 음식 기행보다 못할 것이 없다.

다채로운 매체에 노출된 시간들을 줄이니 소음으로 들끓던 일상이 잠잠해지고 전에 없던 몰입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전화를 받으면서 서류를 보거나 웹서핑을 하면서 카톡 메시지를 동시에 확인하거나 식사를 하면서 신문을 봐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 강박을 벗어나기 위해 가능한 하나의 매체에만 나를 초점화한다. 신문을 볼 땐 티브이를 끄고, 독서를 할 땐 컴퓨터를 끈다. 뻔질나게 지저귀는 휴대폰도 저만치 밀어놓는다. 정보 과부하에 걸려 둔해져 있던 감각들이 비로소 깨어난다. 희미하던 지각도 또렷해져서 다시 활동하는 것 같다. 이 단순한 결단이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노트북 없이 시를 써본 뒤론 유창하던 말수가 줄어든다. 속도를 낼 수 없으니 더듬거리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또박또박 힘을 실을 수밖에 없다. 멀리 갈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속에 갈 수 없는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응축시켜야 한다. 말을 접고접어서 꽃망울 속의 꽃잎처럼 품을 때 언어는 지금 여기에 머무는 채로 저 너머를 살게 된다. 소매를 접고 바짓단을 접던 성장기의 사회과부도처럼 책속에 접힌 지도를 갖게 된다. 성적을 올리는 데는 별 쓸모가 없었지만 그 지도 안엔 얼마나 많은 지명들이 있었던가. 마다가스카르, 그린란드, 마카오, 빼째르부르크…… 축지법이라도 익히듯 불러보던 이름들을 향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어지간한 길은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저 반복에 지나지 않던 데면데면한 풍경들이 이산가족 상봉처럼 감격스럽게 다가온다. 몇 해째 그저 통과하기에 바빴던 골목길의 수국 꽃이 떨어지지 않고 색이 바랜 채로 겨울을 나고 봄을 맞는 걸 처음처럼 발견한다. 질 줄 모르는 헛꽃의 겨울나기는 참으로 질 줄 아는 것이 꽃임을 온몸으로 역설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수국처럼 나도 지는 것에 대한 공포로 잠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밤마다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갈수록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꺼림칙해지는 내가 간신히 나를 마주한다. 이 얼마만의 상봉이란 말인가. 수국에게로 난 길이 나에게로 이어진다. 그렇게 만나는 풍경들은 다 초면이다. 수없이 왔으나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던 풍경들이다.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비의와 미지들로 가득찬 거리. 그 앞에서 나는 신대륙에 첫 발을 딛는 탐험가가 된다.

주말이면 도주하듯 산이나 바다를 찾아 뻔질나게 일탈을 하던 여행중독으로부터 벗어나면서부터 도심의 자연이 오히려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선이나 강원도 깊은 산중에서 흔하게 보는 수많은 별들도 아름답지만 매캐한 도심의 하늘 위로 희박하게 뜬 별 하나는 희미한 만큼 절박해서 뭉클하기까지 하다. 대도시 하늘의 별과 눈을 맞추면서 호흡은 가지런해지고 이유 없이 부산하던 걸음도 어느새 멈춤의 상태에 있게 된다. 골똘한 정지의 상태 속에서 나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이 조직한 질서들을 벗어나 자유의 감각을 회복한다. 이때 도시는 최상의 천문대요 스모그 낀 하늘 위에서 겨우 빛나는 별에 시선을 비끄러맨 마음은 최고배율의 천제망원경이다. 아 별도 흐르고 나도 흐르는구나. 너와 내가 까마득한 우주를 사이에 두고 잠시 이어져있구나.

지층 방에 살게 되면서부터 빛의 소중함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담벼락 아래 창문으로 적선처럼 땡그랑 빛이 떨어지면 깡통처럼 움푹 팬 나의 방은 아연 활기가 돈다. 빛에 관한한 지층은 거의 배화교도에 가깝다. 빛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기르는 난 화분을 옮겨가면서 쬐어도 보고, 눅눅해진 옷가지도 따라 자리를 바꿔가면서 뱅글뱅글 지구의 자전을 실감나게 느낀다. 비록 삼푸를 해도 머리에서 곰팡내가 나지만 애옥살이 몇 평 지층에서 우주를 찬란하게 경험하는 방식이다.

네 해째 동탄과 일산을 오가는 출퇴근길에 지쳐 일터 근처에서 원룸 신세를 지고 있다. 방 쪼개기가 유행이어서 칸과 칸 사이에 어설픈 합판 벽을 두고 온갖 음식 냄새와 소음들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옆방의 고양이 울음소리에 고양이를 증오하는 위인으로 전락할 줄은 몰랐다. 급기야 뉴스로나 보던 소음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관리실에 민원을 넣는 지경까지 갈 줄은 몰랐다. 최근 이 방에 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를 들이고부터 전에 느낄 수 없던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모과는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향을 맡을 수 없을 만큼 모과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평수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룸에 온 모과는 향기로 원룸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내 몸에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전축에 관한 한 전문가적 식견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시단의 선배들 앞에서 원룸에 오면 보잘 것 없는 라디오도 어지간한 전축 못지 않은 공명음을 낸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 적도 있다. 작은 방 전체가 통째로 스피커가 되어 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듬어주는 호사를 서귀포의 이중섭이 머물던 1.5평에 빗대어 장광설을 펴자 전축 자랑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던 선배들은 얄미운 눈초리를 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통쾌함과 짜릿함은 지금도 나를 오연하게 한다.

겨울이 오니 옆방의 전기 판넬 온기가 내 방까지 건너온다. 스위치를 올리고 한참을 기다려야 불이 들어오는데 그 사이 언 몸을 녹여주는 온기가 고맙다. 버스에 올라 빈자리에 앉으니 누군가 남겨놓고 간 체온이 정류장에 얼어붙어 있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서 자리를 데워놓고 간 것 같다. 겨울은 미지의 누군가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김을 준다. 기형도 시인은 그래서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전문)라고 노래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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