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장미숙
그 집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범상치 않은 형태의 나무였다. 나무는 기와집을 배경으로 뒤꼍에 당당히 서 있었다. 예사로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가 아니었다. 시원스레 가지를 쭉쭉 뻗지도 않았고,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드리운 것도 아니었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의 파릇함도, 장년의 노련한 능청스러움도 없었다. 깊은 연륜으로 다져진 범접할 수 없는 기가 느껴졌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는 늙은 몸이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신선처럼 신비한 기운이 뻗쳐 나왔다. 나무는 뒤틀린 채 완벽하게 둘로 갈라진 형태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밑동을 살펴야만 한 그루의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무는 서로 바깥으로 원을 그리면서 안으로 휘어들었다. 그 때문에 몸체가 활처럼 둥글었다. 우듬지가 닿을 듯 말듯 상대방을 향했다. 양쪽으로 마주 선 나무 사이에는 타원형의 공간이 들어앉아 하늘과 주위 풍경을 담았다. 나무가 그린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한쪽 나무의 가지 중, 한 개의 방향이 이상했다. 종(縱)이 아닌 횡(橫)으로 반듯한 수직이었다. 가로 막대처럼 평형을 유지한 채 허공에 놓여 있었다. 그 가지를 붙잡고 있는 건 커다란 옹두리였다. 옹두리는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어떤 충격으로 가지가 꺾인 것 같았다. 나무는 가지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 모양이다. 얼마나 속을 태웠으면 옹두리가 바윗덩이처럼 변할 수 있을까. 옹두리는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읽혔다.
작은 옹두리도 여러 군데였다. 옹두리 때문인지 나무는 울퉁불퉁했다. 그런데 그 옹두리가 새싹을 가득 피워 올린 게 아닌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무에서는 숨소리가 들렸다. 여린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파리들은 칙칙한 옹두리와 상관없이 맑은 연초록으로 찬란했다. 두껍고 까끌까끌한 껍질을 뚫고 나온 생명의 파릇함이 생기로웠다. 나무를 가만 안아보았다.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의 감각을 깨웠다.
기와집 주인이 일러준 건 팽나무였다. 동생과 사진 찍을 일이 있어 전원주택을 찾던 중 방문하게 된 그 집은 남도의 어느 시골에 있었다. 촬영을 흔쾌히 허락해준 주인은 학자 같은 인상을 풍겼다. 결곡함이 서려 있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퇴직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도회지의 삶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중이라 했다. 그의 말대로 집 주위에는 나무와 꽃이 가득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게 팽나무였다.
팽나무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이미 우람했던 나무는 집의 수호신 같은 존재라 했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 슬픔을 삭일 수 있었던 것도 팽나무 덕분이라 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웠던 시절에 나무를 보며 위로를 받은 듯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집터를 지켜준 고마운 나무라며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한 삶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무는 넓은 품으로 그의 눈길을 받았다.
그 순간, 내 마음에도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났다. 아버지 산소에 있는 소나무였다. 생전에 아버지는 소나무를 좋아했다. 선산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산은 생활의 터전이었다. 열 몇 살에 부모님을 여읜 탓에 아버지는 일찍부터 가장이 되었다. 소년이었지만 동생 셋을 책임져야 했을 아버지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다만 나중에 얻은 지병으로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며 지난날을 짐작했다.
아버지는 산을 오르내리며 땔감을 만들어 팔고 소나무를 키워 목재로 팔기도 했다. 소나무는 아버지에게 목숨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산과 함께 살다 산으로 돌아갔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나무 아래 영원히 잠드셨다.
문득 사람에게 나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따라붙었다. 나무는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과 먹을 것을 주는 존재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다른 물건과 같은 소모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나무는 예로부터 인간과 깊은 관련을 맺어온 까닭이다.
신화나 역사에도 특정한 나무들이 등장한다. 북유럽신화에는 ‘수청목(水靑木)’이라 불리는 ‘물푸레나무’가 나오고 ‘그리스 신화’에는 아테나의 ‘올리브나무’가 나온다. 조선조 세조(世祖)의 어가행렬 때 길을 열어줬다는 ‘정이품송’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바오바브나무’도 예사롭지 않다.
그뿐인가. 나무는 추억과 사랑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고,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스럽게, 때로는 자상하고 푸근하게 인간의 삶 속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나무를 보면 쉬고 싶고, 마음이 열리는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팽나무나 소나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함의 상징인 것이다. 밤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등은 이름만 들어도 한 시절의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다. 나무가 있는 배경은 감성을 풍부하게 채워준다. 나무 냄새는 속된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준다.
그러니 한 집안의 역사를 품고 있는 나무의 가치는 물질적인 잣대를 훌쩍 넘어선다. 팽나무가 신령스럽게 보인 건 그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둥치에는 마치 조각가의 손길인 듯 세월이 만들어놓은 무늬가 선명했다. 양각과 음각이 또렷한 무늬는 고랑과 이랑을 연상시킬 만큼 거칠고 깊었다. 그건 나무가 지나온 굴곡의 시간을 말해주었다.
주인은 팽나무가 자신보다 오래 살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미 그에게 팽나무는 나무 그 이상의 의미였다. 잠깐 바라본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생을 함께 한 사람에게는 오죽하랴. 그 집을 나오는데 자꾸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팽나무가 짙푸른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가지를 타고 오르는 아이들을 큰 품으로 보듬어 안고 있는 것을.
그곳에는 한 그루, 나무의 아름다운 생이 있었다.
<선수필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