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이 어둑해졌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 격자 사이로 스며들던 빛이 까무룩 잦아들었다. 아직 한낮인데도 단출한 옷장과 네모진 궤가 놓여있는 작은 방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마침내 할머니의 손끝에서 계속되던 경련이 멈추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며 내리는 함박눈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른거렸다. 방문 손잡이 옆에 오려붙여 놓았던 파랑새의 날개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반쯤 벌어진 할머니의 입에 물려 있던 놋숟가락을 빼냈다. 놋숟가락의 손잡이 부분은 길게 찢은 무명천으로 칭칭 동여매여 있었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혀를 깨물지 않게 하려고 입에 물리는 도구인데, 늘 문지방 위에 놓아두던 것이었다. 입가에 묻어 있는 약간의 침 자국을 제외하면 할머니는 평온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할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무쇠 가위로 파랑새를 오려내곤 했다. 종이를 이리저리 접어서 그 사선 어느 부분엔가 가윗날을 들이대면 신기하게도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할머니는 구멍이 숭숭 뚫린 여러 가지 꽃 모양이나 ‘福’자나 ‘壽’자를 오리기도 했지만 파랑새 오리기를 가장 좋아했다. 주로 창호지나 습자지 같은 얇은 종이가 쓰였는데, 때로는 내가 내미는 파랑색 색종이일 때도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오려낸 파랑새의 뒷면에 밥풀을 발랐다. 앙증맞은 부리에 동그란 배, 그리고 튼실한 날개를 가진 파랑새들은 어둡고 좁은 방 벽과 천장, 그리고 방문 창호지 위로 날아 앉았다.
그러나 결코 창공으로 날아갈 수 없었던 파랑새들처럼 할머니 역시 좀처럼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었다. 오랜 지병인 뇌전증이 언제 어디서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두운 방 벽에 기대앉아 비스듬히 열린 방문 사이로 환한 햇살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희끗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머리 위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파랑새들이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뒤주 위에 놓여 있는 달항아리 마냥 단아하신 분이었다. 희고 넓은 이마에 동그란 눈, 나지막한 콧날은 이해심 많고 조용한 할머니의 심성을 대변해주었다. 정갈하게 가르마 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무명 저고리의 앞섶을 단정히 여민 할머니는 아름다웠다. 온갖 남루하고 구차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자세를 흩트리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에게서는 언제나 달빛 같은 은은함이 배어나왔다.
이런 할머니를 두고도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딴살림을 차렸던가 보았다. 중절모에 긴 외투를 입고 오른쪽에는 일본 여자를, 왼쪽에는 중국 여자를 세워놓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만주로 동경으로 휘돌던 할아버지였다. 대대로 물려받은 가산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할아버지의 외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빈손으로 할머니에게 돌아왔다.
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말들을 과연 몇 마디나 할아버지에게 할 수 있었을까. 그저 입안에서 웅얼거리고 말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 작은 소리조차 할아버지의 귀에 들렸던 것일까. 한여름, 볕으로 하얗게 바랜 마당을 건너오는 할머니를 향해 할아버지가 재떨이를 던졌다고 했다.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퍼오던 할머니는 머리에서 고추장 같은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그 후부터 지병이 생긴 것이다.
발작에 일정한 주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짧게는 한 달에 서너 번, 길게는 몇 달에 한두 번 찾아왔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할머니는 태풍에 갇혔다가 풀려난 새처럼 땀에 흠뻑 젖은 채 축 늘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방문을 열어 지나가던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나 따사로운 햇살 한 줌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혼곤한 잠에 빠진 할머니의 이마를 조용히 어루만졌다. 그러나 함박눈이 펑펑 오던 그날, 할머니의 파랑새가 날갯짓을 한 것 같았던 그날, 아버지는 방문을 열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도 눈은 계속 내렸다. 흰 눈이 마당을 덮고 지붕을 덮고 신작로를 덮었다. 땀과 눈물로 얼룩졌던 할머니의 지난한 일생에 하늘이 희고 깨끗한 수세포를 덮어준 것이었을까. 온 세상이 눈에 묻히고, 스며든 어둠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흐려질 즈음, 대문 기둥에 두 개의 조등이 걸렸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연신 눈시울을 훔치는 조등이 유난히 붉었다.
하얀 마당에 갈지자 발자국을 남기며 막내고모가 달려 들어오고, 그 뒤를 낭자한 곡소리가 따라왔다. 이윽고 입관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숙아. 저 건너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 두 보루만 사오너라.” 아버지가 쥐어주는 지폐를 받아들고 마당을 나서는데, 눈발이 가늘어졌다.
마을 공터를 지나고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거짓말같이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사라진 흰 눈밭에 나와 보름달뿐이었다. 할머니가 보름달을 보내어 앞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래 담배 가게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담배 가게를 오가는 동안 마치 할머니가 내 곁에서 함께 걷는 듯했다. 언덕배기로 되돌아오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새떼처럼 함박눈이 흩날리고,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는 보름달이 보였다. 그 보름달을 향해 흩어지는 눈발 사이로 조용히 날아오르는 한 마리 파랑새의 날갯짓을 본 것은 나의 환시였으리라.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경술년 동짓달 열이레, 마침내 할머니의 파랑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