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정재순

 

 

 

봄마다 목이 길어진다진달래가 움트는지 보려고 부지런히 산을 오르내린다메마른 풀숲 사이에서 몽긋몽긋한 몽우리를 발견하는 날엔 웃음과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습진 응달에서 겨울을 보낸 진달래는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꽃망울을 내미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 산허리를 발갛게 물들인다들머리 향이 없는 진달래지만 그윽한 향기를 느낀다멀리서는 한가지로 보이던 진달래가 송이마다 빛깔이 다르다붉은 기를 잔뜩 베어 문 것이 있는가하면 창백하고 희끄무레한 것도 뜨인다색이 유난히 새뜻한 진달래는 내 오랜 지기와 닮았다.

친구는 진달래만 보면 마음이 달뜬다. ‘신념이라는 꽃말도 왠지 끌린다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지난한 겨울을 견디고 가지 끝으로 쏘옥 내미는 분홍빛이 어여쁘다는 것이다봄을 알리려고 잎보다 먼저 나온 진달래 몽우리가 보면 볼수록 장하다고 몇 번이나 되뇐다.

그날도 순한 햇살이 내리는 봄날이었다동네를 둘러싼 산은 온통 불을 질러 놓은 것 같았다우리는 꽃바람이 일렁이는 오붓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입술을 물들이며 진달래를 따 먹던 시절을 얘기 나누면서 반나절을 보냈다알싸하면서 단맛이 찐한 꽃잎 가까이서 오래 머물렀으니 꽃 세상도 사람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가보다.

진달래가 만발한 산은 사람을 품어 안는 마력이 있다웃을 일이 드문 갱년기에 든 두 여인을 철부지 같은 수다쟁이 소녀로 만들어버린다능선을 오르다가 톡 불거진 돌부리를 보고도 웃음이 쏟아진다친구의 숨은 재주도 그래서 알게 되었다.

친구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낱말과 어울리는 노래를 금방 연상해내어 흥얼거리고 시를 읉었다수십 년 전에 배웠던 것들을 어찌나 또렷이 기억하는지 놀라웠다그 옛날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진달래꽃도 거침없이 낭송했다감정이 절로 잡히는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제스처까지 넣어서 하는 폼이 제법 그럴싸했다발음이 정확하고 몸가짐도 반듯해 좀 더 공을 들이면 훨씬 근사할 것 같았다시 낭송과 어울린다며 배워 보라고 권했다.

처음엔 귓등으로 듣던 친구는 또다시 권하자 관심을 보였다온 산이 진달래로 물들 즈음 우리는 시 낭송을 배우기 시작했다나는 시가 외워지지 않아 난감할 지경이었다가진 총기를 몽땅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한 구절을 외우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면 외워 둔 앞 구절이 햐얗게 지워졌다.

하지만 그미는 달랐다머릿속 기억장치가 말가니 윤이 반들거렸다눈이 읽어내는 대로 누에치처럼 입으로 술술 풀어냈다제법 긴 시도 거뜬하게 금방 제 것으로 만들었다거기다 무대에 오르면 다른 사람 같았다떨리거나 주눅 들지 않고 외려 신명이 난다는 것이다그동안 이걸 안 하고 어찌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그야말로 무대 체질이었다짧은 기간에 시 낭송에 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섭렵해 주변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때가 있는 모양이다한껏 피어나는 그미를 보면 진달래와 닮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친구는 지금이 한창 전성기 같다오십 줄에 곱디고운 꽃으로 거듭나는 중이다채 일 년도 안 되어 큰 대회에서 상을 받고 낭송가로 인정받아 여기저기 초빙되기도 하고 아울러 재능기부도 하면서 지낸다.

화르르 꽃을 피워 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이루지 못한 꿈으로 회한에 젖으면서도 새로이 도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이제 와 내가 뭘하고 망설이기 십상이다그미를 보면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꽃 피우는 일과 하등의 산광이 없음을 알겠다마음이 꽃을 피운다고 했던가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는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해한다.

그미와 찻집에 마주 앉으면 웃음이 저절로 난다어쩌면 이다지도 다를 수 있을까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눈과 꿈속에서 헤매는 듯 고요하니 쪼그만 눈차림새 또한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반면에 이쪽은 오늘이나 어제나 그제나 별 차이가 없다뻔적 뻔적하고수수해서 누가 봐도 풍기는 분위기가 극과 극이다그럼에도 우리는 지극히 편안한 사이다오륙 년 후쯤엔 친구가 실버모델에 도전했으면 좋겠다무척 어울릴 것 같다.

봄은 희망을 주는 계절이다춥고 어두운 시간은 진달래 분홍빛처럼 깨어난다흐드러지게 핀 꽃길에 선 그녀의 환한 모습이 참 곱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