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박경대

평소와 다른 아침이었다문을 열자 서늘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로 식당으로 가는 길이 미로 같았다바닥이 미끄러워 내려다보니 하얀 꽃잎이 길 위에 빽빽이 깔려있었다깊이 잠든 어젯밤바람이 많이 불었나 보다안개에 묻힌 꽃길을 보는 순간 생뚱맞게 티베트 할머니가 생각났다오래 전그날 아침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20여 년 전 뉴델리호랑이를 찾아 떠나는 날 아침 티베트 할머니는 장롱 깊숙이 간직하던 스카프 한 장을 나의 목에 둘러 주었다희고 긴 비단 스카프로 카닥이라고 하였다땟국물에 찌들고 낡아 마뜩잖았지만티베트의 풍습으로 행운을 비는 선물이라는 말에 얼른 고개를 내민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큰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있으면 희고 긴 천을 준비해 두었다가 바치는데스님은 그 천에 축복을 내려준다고 하였다그 천을 카닥이라고 하며망자가 두르면 편안히 천상에 오르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온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카닥을 두 장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그중 하는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등질 때 가슴 위에 놓아드렸고나머지 하나를 나에게 준 것이다그 말을 듣고 좋은 기분으로 호랑이 서식지를 향해 출발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동물을 촬영하기 위해 케냐 땅을 밟은 지 오늘로 한 달이 지니고 있었다처음부터 숙소와 렌터카 계약이 쉽지 않았다게다가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머리는 계속 묵직하였다일주일쯤이 지나 그런 문제는 해결되었지만좋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초조함에 가슴이 답답하였다그 때문이었을까젊은 시절인도에서 우연히 만나 카닥을 선물 받았던 할머니가 20년이나 지난 시점에 불쑥 생각난 것이다.

촬영에 나설 즈음 안개가 많이 걷혀 있었다장비를 챙겨 지프에 오르니 운전사인 애반스가 피우던 담배를 끄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국경을 따라 흐르는 마라강으로 방향을 잡았다지금은 누 영양이 도하를 감행하는 시기이다.

싱싱한 풀을 찾아 탄자니아와 케냐를 넘나드는 누 영양은 매번 수만 마리에 달한다많은 숫자가 일순간 강을 건너고 그때를 기다리는 악어들로 강은 피로 물드는 살육의 현장이 된다그 광경이 역동적이고 적나라하여 실로 동물 시진의 백미로 불린다.

강은 조용하였다악어 몇 마리가 눈만 내놓은 채 물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강이 내려 보이는 곳에 주차하고 기다림에 들어갔다시간이 멈춘 듯 지루한 한낮이었다도시락을 먹고 태양이 붉은색을 띨 때까지 지나간 동물은 워터벅 몇 마리와 기린무리 뿐이었다.

오늘도 촬영은 틀린 것 같았다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꺼내 둔 장비를 챙기고 있던 그때 힘겹게 걷는 누 영양 한 마리가 차 앞을 지나갔다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자칼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늙는 누 영양을 노리고 따라붙는 게 분명하였다촬영 소재가 될 것 같아 나도 강변으로 난 좁은 찻길로 들어섰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비늘과 역광의 영상미 때문이었을까 강을 따라 걷는 세 마리의 동물이 아름답게 보였다하지만그 표현은 엉뚱했다죽음을 목전에 둔 누 영양과 목숨을 앗으려는 자칼이지 않은가.

비록 누 영양이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걷지만몸집이 작은 자칼이 부담을 느끼는 듯 달려들지 않았다하지만 매 순간 눈 영양의 상태는 나빠지고 있었다.

잠시 후길옆에 물웅덩이가 나타났다누 영양이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려면 그때 앞다리가 푹 꺾어지더니 물속으로 머리가 빠지고 말았다누는 누운 채로 물을 핥아 먹는 것처럼 몇 번 목을 흔들고는 움직임을 멈췄다석양에 반사된 물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하이에나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숨을 몰아쉬던 하이에나가 누 영양의 배를 물고 흔들었다배는 금세 찢어졌다자칼은 다음 순서로 밀렸고하늘에는 독수리가 맴돌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하이에나가 어느새 세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그들은 대식가였다자칼은 빨리 먹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돌아다녔고하늘의 독수리들도 내려와 주위에서 서성대었다.

배부른 하이에나가 떠나자 자칼이 자리 하나씩 뜯어 물고 가벼렸다다음 순서로 독수리가 떼로 몰려 누의 살점을 발라먹었다사체를 덮다시피 물려 있는 독수리를 보던 중문득 티베트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티베트에서는 풍장이라는 장례문화가 있다불심이 깊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 이승을 떠나면 탁 트인 산에 시신을 발가벗겨 독수리의 밥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새들을 위한 망자의 마지막 보시인데 하늘을 나는 새처럼 영혼이 천상으로 훨훨 올라가라는 뜻이다그때가족이나 친한 벗이 시신 위에 카닥을 놓아둔다고 했다.

누 영양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머리와 뼈만 남았다여러 동물과 새들에게 몸 보시를 하고 세상을 마친 것이다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그의 죽음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석양은 마지막 열기를 태우듯 검붉어졌다붉은 석양이 다음날 밝은 태양을 불어오듯 신은 아름답고 숭고한 죽음에 화려한 환생을 약속하리라누의 주검을 보던 중 나는 여태 무엇을 보시한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그 순간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이 생각났다회색 손수건을 꺼내어 누 영양의 머리 위에 가만히 덮어 주었다비록 큰스님이 축복을 내린 카닥은 아니지만나의 마음을 모은 보시로 그의 마지막이 꽃길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아침보다 더 많은 꽃잎이 길 주위를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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