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군대마저 물리쳤다는 동장군이 기세등등하다. 서둘러 찾아온 추위는 땡고추보다 맵다. 월동준비를 볶아쳐야 할 때. 때맞춰 절인 배추가 온다는 기별이다. 김장준비를 하기 위해 옷을 껴입었다. 두꺼운 외투를 걸쳤지만, 귀가 시리다. 모자까지 질끈 눌러 쓰고 마트로 향했다. 정면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외면하며 보폭을 재촉했다. 바람 구덩이인 언덕을 내려서며 피식 웃었다.
오늘처럼 바람이 매섭던 날, 일곱 살이었던 딸을 마트에 보냈더니 되돌아왔다. 빈손으로 현관에 들어서는 아이를 보며 놀랐더니 "엄마, 바람이 무서워서 못 갔어."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바람이 얼마나 매서웠으면 용돈까지 포기를…. 오래전 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바람과 맞섰다. 그 딸이 스물일곱 살이 되었으니 딱 이십 년이 지났다. 그때 어린 딸은 바람과 맞서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스물 일곱 살이 된 지금의 딸은 역전의 용사 같이 바람 부는 세상에서 저 홀로 나아가고 있다.
웃음을 치며 모퉁이를 돌아서니 길 한복판에 큰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움찔 놀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섰다. 그 옆에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조아리고 여인이 앉아 있다. 여인은 애절하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어르고 있다.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다 파묻은 채 움쩍도 하지 않는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바람 소리에 섞인 여인의 목소리는 애절하다 못해 우는 소리 같다. 그래도 아이는 묵묵부답이다. 길을 지나던 청년까지 나서보지만 어림도 없다.
아이를 달래던 여인이 울음보를 터트릴 태세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문득 생이 버티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맵싸하고 여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다. 하나 아이는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한 생각에만 갇혀 있다. 요지부동인 저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아이의 고집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음이 더 안타까웠다. 나보다 작고 여린 것에 연민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무 보탬도 되지 못하고 옆에 선 내가 부끄러웠다. '덩치라도 작으면 업고라도 가지….' 혼자 중얼대다 발걸음을 옮기니,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이 언덕을 내려설 때보다 차갑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였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모자母子였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웅크리고 있는 이는 아이가 아니라 이미 청년이었다. 수년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몇 해 전, 그들은 가끔 내 눈에 들어왔다. 외출하고 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들은 행동이 이상했다. 엄마는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와 꼭 동행했다. 홀로 다닐 수 있을 나이였지만 장애가 있어 돌보아야 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기다리는 쪽은 엄마였다. 바쁠 것도, 생각도 없이 굼뜬 아이를 뒤따르는 엄마는 마치 초월한 사람 같았다. 백 미터를 이동하는 데도 천하태평…. 길을 가다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느림보 거북처럼 걸어도 말없이 아이를 기다렸다. 속이 타고 조급증이 날만도 할 텐데 참으며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고 싶고, 얼른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을 텐데도 엄마는 늘 아들과 발을 맞추었다.
꽁꽁 언 길에서 막무가내로 버티고 앉은 아들을 달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애잔해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시중을 드느라 주름살은 늘었고 그늘이 짙어져 있었다. 늘 아이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하는 어미. 그 어미의 묵묵한 침묵이 수 없는 겨울을 버티게 했을 터이고, 허허벌판에 홀로 선 아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 어머니의 그윽한 희생이 장애가 있는 아이의 일생을 버티게 하리라.
몇 해 전, 그날도 그랬다. 우연히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그들을 만났다. 집이 가까워져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데 아이는 내릴 기미가 없었다. 내려야 한다며 아이를 잡아끌어도 좌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를 어르고 달랬지만 내리려 하지 않았다. 때마침 같은 정류소에 내리던 내가 도와 아이를 끌어내렸다.
정류소에 내린 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분통을 터트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는 두 다리를 비비며 엉엉 울었다. 만일 내가 그 아이의 엄마였다면…. 여인은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이 처연했다. 떼를 쓰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먼저 집으로 들어왔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아파트 입구에 그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가야 하는 길. 어머니의 길은 그런 것이다. 아이로 인해 얻은 어미의 세상은 늘 현기증처럼 노랗게 흔들릴 터. 비명을 지르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소리 없는 눈물만 흘릴 것이다. 하얗게 짙어진 성근 머리칼, 깊게 들어가 슬픈 눈동자. 더욱 옅어진 그녀의 그림자가 내 발길에 자꾸만 밟힌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아릿한 얼룩 하나쯤은 있기 마련. 어떤 이름을 부르면 가슴부터 저리는 것이 애린이다. 버릴 수도, 끈을 놓을 수도 없는 가슴 에이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면서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애린이다.
장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다시 그들을 만났다. 아이가 웅크리고 있던 자리에서 보이지 않아 집으로 들어갔나 했더니 아파트 주차장에 주저앉아 있다. 그 모습을 또다시 보자니 나도 몰래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아가야, 어서 집으로 들어라, 네 엄마 주름살 는다.' 장바구니가 무거워 그들을 뒤로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등줄기가 시리다. 집에 들어와 거실 창밖을 보니 희미한 해가 지고 있다. 겨울 들녘에 햇살이 하얗게 까무러치고 있다. 아, 끝나지 않을 그들의 겨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