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경자년이여 잘 있거라/ 이경구(시애틀 문인)
2000년 새 밀레니엄의 시대가 왔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지나 2020년 경자년(庚子年) 쥐띠의 해를 맞이하였다. 쥐는 다산과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숫자 20은 내가 옛날 서울에서 살 적에 극장에 가면 스크린에 제일 먼저 나왔던 ‛20th Century Fox’를 떠올린다. 20세기 폭스사의 로고에 있는 그 숫자는 도약을 뜻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한다. 숫자 20이 가지런한 2020년은 나에게 참 좋은 해가 될 것 같다.
벨뷰에 사는 딸이 우리 집에 들렀다. 종이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새 달력 ‛2020 CALENDER’가 들어 있다. 80대 중반을 넘긴 나는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 옆에 걸어 놓았다.
정월 중순이 되니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라는 전염병이 2019년 11월 중국 무한에서 발생하여 세계로 퍼지고 있다고 온라인 신문이 보도하였다. 미국에서는 2020년 2월 29일 첫 번째 사망자가 내가 사는 워싱턴주에서, 본국에서는 그보다 이른 1월 20일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하였단다. 코비드 19 팬데믹은 인류가 처음으로 맞는 대재앙이란다.
워싱턴 주지사는 2월 29일 주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워싱턴주 보건당국은 예방 행동 규칙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인즉 손을 깨끗이 씻고, 기침할 때는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고, 몸이 편찮을 때는 집에서 쉬며, 쇼핑몰 안에서는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옆 사람과 6피트의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한다. 코비드 19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 갈 뿐만 아니라, 풍습까지 바꾸고 있다.
엠에스엔 뉴스(msn news)에 따르면, 2020년 8월 27일 10:49 시(AM local) 기준으로 워싱턴주의 코비드 19 누적 확진자는 72,161명이고 사망자는 1,880명이다. 미국 전체의 코비드 19 누적 확진자는 5,899,331명이고 사망자는 181,791명이란다. 미국은 세계에서 감염자가 가장 많고 사망률도 높다고 한다.
나는 집 안에 들어앉아 자식들에게 짐이 될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였다. 노인은 코비드 19에 걸리지 않으려면 집에서 쉬라니, 서고에 있는 헌 책들을 골라냈다. 젊어서 외교관 생활을 할 때는 영문 편지 작성에 관한 학술서 3종을 지었다. 책을 쓸 때는 유용하게 활용했는데, 지금은 너절하게 된 참고서들과 초안들을 종이 상자에 담노라니, 눈시울이 젖는다.
공직을 정년퇴직한 후에는 수필 공부에 취미를 붙였다. 글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사는 동안에 문단에 등단을 하였고, 수필집 『소랜토 아리랑』과 『시애틀의 낮달』을 발간하였다. 지금도 수필을 써서 동포 온라인 신문인 ‛Joy Seattle’과 본국의 문예지에 기고한다. 나의 글쓰기를 뒷받침하던 낡은 서적들과 내 정성이 듬뿍 들어 있는 허름한 원고들을 종이 상자에 담을 때면, 마음이 허전하다.
외국어 소설을 정리할 차례가 되었다. 책들을 상자에 담기 전에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지은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읽었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참새치 낚시질과 그의 인생관 이야기다. 작가가 쿠바의 아바나 근처에서 썼다고 하니, 코비드 19 팬데믹이 가라앉으면 구경을 가야겠다.
그 작품에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경구이다[雖死不敗]. 늘그막에 다시 읽노라니, “He was still sleeping on his face and the boy was sitting by him watching him. 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lions. (노인은 아직도 엎드린 채 자고 있었고, 소년은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들 꿈을 꾸고 있었다.)”라는 결미가 더 진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