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걷이 / 정복언
가을은 땀방울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아침에 동네 길을 산책하노라면 감귤밭으로 시선이 쏠린다. 몽실몽실 매달린 청과들이 온종일 볕바라기에 열중하며 단맛을 키우는 노고를 떠올리게 한다. 극조생 귤은 이미 절반 이상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제주의 감귤원은 황금색 물감을 풀어놓아 ‘귤림추색’의 진풍경을 이룰 것이다.
콩밭으로도 눈길이 머문다. 계절을 감지한 듯 드문드문 누렇게 탈색한 잎들이 눈에 띈다. 작은 키에 올망졸망 꼬투리를 매단 모습이 옛날 부모님 세대 같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 그게 삶의 전부인 양 생명의 디딤돌을 이어 갔지 않은가. 그 시절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순수하고 정이 흘렀다. 자연 속에서 나뒹굴며 밴 마음의 무늬였을 테다.
세월이 흐르면서 엇비슷했던 삶의 환경은 많이 바뀌었다. 문명의 이기로 황제의 삶이라 할 만큼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지만, 양극화의 골은 깊어만 간다. 배불러 사망하는 사람과 허기로 죽는 사람이 공존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황금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시절이니 쉬 해결될 문제가 아닌 성싶다. 탐욕을 제어할 브레이크는 없을까.
이 가을, 내 뜰은 야윈 가슴이다. 비가 내릴 때마다 주렁주렁 달렸던 대봉감은 틈틈이 한둘씩 낙과하더니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기 주먹만큼 키워 놓고 이별하는 어미 나무의 심정이 어떠할까. 혹시 방관만 해 온 주인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무슨 일에나 전문가가 필요하다. 농작물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푸성귀 몇을 심어 놓고도 친환경으로 키우긴 어렵다. 온갖 벌레나 균들이 세상살이에 적응하며 세를 늘린다. 그들에게 들깻잎을 한순간에 망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심술을 부리듯 배춧잎에 숭숭 구멍을 뚫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는 일종의 소일거리나 다름없으니 이놈들의 행패를 허허롭게 웃어넘길 여유가 있다.
어제는 몇 년 동안 키워 오던 대추나무를 기어이 베어내고 말았다. 새들이 쪼아대는 바람에 상처 없는 열매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농약을 치지 않고는 따먹을 게 거의 없음을 여러 번 경험해서다. 그 자리에 무화과나무를 심을 요량이다. 올봄에 문우에게서 꺾꽂이로 뿌리내린 묘목 한 그루 얻어 심었더니 썩 호감이 갔다. 잘 자라며 질병에도 강하고 열매도 많이 달렸다. 게다가 맛도 좋았다. 자연에 그대로 놔둬도 자릿세를 톡톡히 내겠다는데 마다하겠는가.
내 생의 계절은 어디쯤일까. 100세 시대라지만 여기저기 몸이 탈나는 것을 보면 겨울의 문턱을 성큼 들어선 건 아닐까. 섬뜩하기도 하다. 돌아보니 땀 흘려 해 놓은 게 없지 않은가. 한 줌 가을걷이도 없이 지나는 생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쓸쓸한가.
가끔 생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어떤 말을 남길까 헤아려 보곤 한다. 빈손으로 떠나는 허망함을 말하진 않으리라.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하지도 않으리라. 왜 세상에 태어나서 힘들게 사느냐고 원망했던 시간을 반성하고, 하느님을 마음대로 재단하려던 잘못을 빌리라. 하늘을 보고 꽃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던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했던가를 고백하리라.
올해 초에는 어머님을 떠나보냈다. 긴 세월 동안 어이해서 따듯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게 식사하고 손잡고 나들이를 하지 못했을까.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한 번 만이라는 단어가 빗물처럼 가슴으로 내려 흥건해진다.
내일 택배를 배달하겠다는 문자가 왔다. 하루만 지나면 첫 수필집이 내 품에 안기게 되나 보다. 예제에 어색한 표현이 한둘일까만, 그래도 늦둥이처럼 품에 안으련다. 한 권 들고 먼저 부모님 산소를 찾아뵈야겠다. 까막눈으로 세상을 사느라 서러웠는데 내 아들이 책을 내다니 기쁘다며 환히 웃으실 것만 같다.
내 영혼의 촛불을 켠 채 생명의 의미를 짚어보고 삶의 고통을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어느 독자에게 전해져 작은 위안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친 바람일 테다. 그저 삶의 넋두리가 내 슬픈 시간을 위로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가을걷이의 계절, 철없이 내 마음의 빈 뜰에 다시 글의 씨앗을 심는다. 자연의 노작은 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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