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물갈이를 했다. 열대어들이 죽고 말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뜰채로 건져 쓰레기통에 버리고 창밖을 기웃거린다. 딸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오랜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물고기 키우는 재미로 대신한다는 말에 마음이 켕긴다. 상경한 날부터 집안일에 옷매무새까지 내 잣대를 대고 눈칫밥을 먹이자 "바야흐로 엄마의 눈치시대가 도래했다."며 흘끗거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양새를 남편이 본다면 "참, 당신은 눈치가 없어서 탈이야."라며 또 눈치 없이 끼어들 게 뻔했다.
나는 눈치에 둔감한 편이다. 아니, 너무 예민한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나보다 힘이 더 세서 굽실거릴 때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보니 눈치를 보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낯선 이들은 거북하고, 의례적인 자리는 자연스럽지 못한 분위기로 쭈뼛거린다. 어떤 일에 대한 선택과 결단에 있어서도 우유부단해 융통성이 없다는 소리만은 피하고 싶은데 시답잖은 일로 눈치까지 볼 때는 한심하다. 나를 나조차 바로 세우지 못할 때의 자책과 두려움이 눈치를 보게 만든다고나 할까. 남들은 걸쭉한 입담과 넉살로 입술에 착착 감기는 말을 눈칫껏 잘하는데 나만 입안에 혓바늘이 돋는다.
아주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 그렇다. 상대가 한눈을 팔면서 새침하거나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면 이상기류임을 이내 감지한다. 눈빛이나 행동이 난감하고 어색하다. 그러나 의도를 내색하지 않으니 초조감만 더할 뿐이다. 눈치작전으로 끌고 가 속내를 떠본다 해도 그 까닭을 명쾌하게 읽어낼 재간도 없다. 암중모색에 든다. 남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 불통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자신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린다.
국어사전에는 눈치를 '남의 생각이나 태도를 알아챌 수 있는 힘'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어령은 "약자가 강자의 마음을 살피는 기미며 원리원칙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없어서 아니 될 지혜다"라고 언급한다. 아무래도 삶이 고되거나 취약하면 눈치 볼 일이 늘어날 것이다. 눈치를 주는 쪽은 강자요, 이를 감당하는 쪽은 약자다. 이들은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대립각을 세운다. 서로 간의 불화나 갈등을 두고, 강자라고 해서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사로 반감을 표출하기보다 우회적은 방식인 눈치로 하여금 약자에게 관용과 배려, 아량을 베푼다면 조화로운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점은 눈치가 하나의 의사전달 체계로써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눈치는 '우리'라는 공동체적인 삶에서 자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집성촌의 문화나 두레나 품앗이 등 농경시대의 정서가 그 원형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로부터 가난에서 오는 고통은 처절하다. 먹고 사는 욕망이 저실하다보니 일상에서 눈치만큼 다의적으로 통용되는 어휘도 드물었던 것 같다. 구사하는 관점에 따라 눈치가 빠르다, 눈치를 주다, 눈치를 본다, 눈치를 살피다, 눈치를 이겨내다 등등 질감이 다르다. 어느 대화나 문장에 놓이더라도 관형어나 서술어가 끝없이 파생하면서 오늘날까지 공존해오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자기감정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낼수록 입말이 가지는 부담감은 커진다. 행위에도 눈치가 개입될 여지가 다분히 있다. 바쁜 세상에 눈치코치 볼 것 없다고 흰소리로 기염을 토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삶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달라진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햄릿형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무시하고 정의감에 불타 호기를 일삼는 돈키호테형도 있다. 이들에게서 눈치가 너무 빠르면 영악하고 얍샵해 아부근성으로 비쳐지는 반면 발바닥이면 오해나 편견으로 책잡히기 십상이다. 중용이나 균형 맞추기가 바람직하겠으나 그간에는 우리 젊은 세대들도 눈치를 보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물질적 풍요와 개인주의 성향으로 간섭받고 참견하기를 싫어해서이다. 당연한 귀결인지는 모르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 역시 돈키호테형을 선망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햄릿형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눈치가 일당백이다. 이 말은 경쟁이나 승부수로 자리매김하는 세상에서 망막의 온도차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눈치 하나로 주변을 제압하는 처세술의 달인이다. 예컨대 눈치라는 물고기가 유속이 빠른 강물을 쏜살같이 헤엄치듯 눈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을 휘돌아나간다. 기민하고 능숙하다. '눈치 빠른 사람은 절간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속담을 곱씹게 된다. 땅에 핀 풀꽃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도 감정이 끌리는 대로 바람의 눈치를 살핀다지 않는가.
눈치는 내면의 욕구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말이나 문자가 아닌 시선과 표정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소통방식이다. 눈빛과 눈짓, 몸짓이 동원하는 몸의 언어이자 묵언의 메시지다. 이는 내가 가진 언어로는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텔레파시나 직관, 감각이나 감성 등 비언어적 기호와의 교감이다 보니 불확실하거나 추상적이다. 아울러 자의적이고 암묵적인 데가 있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로 접근하기보다는 눈치로써 완곡하게 표현한다면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딸아이가 죽은 물고기를 꺼내어 화단에 묻는 걸 힐끔힐끔 쳐다본다. 눈길이 포개질 때마다 한껏 저자세를 취한다. 이 곤경을 눈치껏 빠져나가기로 한다. 잔소리는 견갑골에 넣어두고, 맛있는 음식으로 너스레를 떨어볼 작정이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통수권 회복을 부르짖던 말이 설익은 밥알처럼 까끌까끌하다.
내 눈 속에 앵무새가 산다. 아무도 내 눈물샘에 숨어든 새를 눈치채지 못하리라. 먼 하늘을 응시하는 새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눈치 없는 새가 '눈치를 버려야 말을 얻는다'는 내 속엣말을 입에 물고 흉내를 낸다. 푸드득, 푸드득... 비상을 꿈꾸지만 날지 못하는 새. 바람이 괸 바닥에는 날갯짓하다 떨어뜨린 깃털 몇 개가 어눌한 발음처럼 웅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