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김영화

 

동무 동무 어깨동무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50-60 년에는 장난감이 별로 없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하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어깨동무 씨 동무, 다리가 아파서 절룩,

미나리 밭에 앉아라

언제든지 같이 가고, 언제든지 같이 놀고

해도 달도 따라오고, 다리가 아파도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아라.

어깨에 서로의 팔을 얹고 이 노래를 부르며 나란히 걷다가 앉아라.하면,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다 같이 앉는 놀이다. 이중에 하나라도 앉지 않고 서 있으면 어깨동무한 팔이 풀어진다. 씨 동무 란 농촌에서 씨앗처럼 소중한 동무라는 뜻이다. 다리가 아픈 동무를 위해서는 시궁창물이 질퍽한 미나리 밭이라도 같이 앉는다 라는 노래다.

이 동요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아이들이 어깨동무 놀이를 하며 불렀던 전래동요의 하나라고 한다. 이 노래가 남한 일대에 널리 펴져서 불리었다. 나도 동네 동무들 6~8명이 모여서 어깨동무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 때는 이 놀이 노래 가사의 뜻은 전혀 모르고 여럿이 모여서 노래에 맞추어 노는 것이 재미났다. 동무라는 정다운 말이 요즘은 어른들이 쓰는 친구로 알고 있다. 아마도 이북에서 주로 아바이 동무, 김 동무등으로 많이 사용하면서 이북 말씨로 전락된 것 같다. 하지만 동무 동무 어깨동무, 씨 동무말만 들어도 얼마나 정감이 넘치는가! 나 보다 키가 작아도, 다리가 절룩 아파도, 누더기 옷을 입었어도, 옷 소매에 콧물이 반질반질하게 묻었어도 씨앗처럼 소중한 어깨동무였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마을 동무들 보다 나이도 1~3살 어렸고, 키도 작고, 몸이 허약했다. 6~7명의 동무들이 내 책보까지 짊어주며 나를 재일 중앙에 놓고 어깨동무해 주었다. 나는 중앙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를,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 말하면 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동무들이 내 말을 따라 주었다. 홍수가 나서 개울가에 물이 넘칠 때에도 어깨동무하며 물살을 헤치고 건너며 학교에 다녔다. 내가 물에 빠져 절퍽 앉으면 동무들이 어깨를 풀지 않고 다 같이 앉아서 물에 젖은 생쥐처럼 되었다. 어깨동무 노래처럼 동무들은 나를 위해 젖어가며 언제든지 같이 가고, 언제든지 같이 놀았다.

어깨동무하며 함께 놀고, 함께 살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만일 동무 중에 자기 새 옷을 더럽히기 싫거나, 물에 젖어 생쥐 같이 되고 싶지 않거나, 감기 걸릴까 두려워서 같이 미나리 밭에 앉기를 거부하면 자연히 어깨동무는 풀어지게 된다. 내 어렸을 때 동무들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도 조건 없이 배려해주며 품어주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사람들은동무의 어깨에 팔을 얹고 나란히 걷고, 뛰고, 앉으려면 키가 어느 정도는 같아야 하고,  서로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요즘은 어른 뿐 만 아니라 어린애들도 동무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동네에서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부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등을 본다고 한다. 그 조건 중에 들지 못 하면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하니 왠지 땡감을 씹는 기분이다.

오래전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한 어머니의 얘기가 생각난다. 그분을 잘 아는 듯한 학부모가댁의 아들은 공부도 뛰어나고, 댁은 재력도 있는데 공립학교에서 뵙네요?한다. 왜 아들을 유명 사립고등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립학교에 보내는지 물었다. 학생의 어머니는 자기네 아들의 교육관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아들이 공립학교에서 여러 계층의 아이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터득하며, 공부도 동료들과 상부상조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아들이 장성해서 어느 위치에 있던지 자신과 다른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같은 조건을 가졌다고 해서 어깨동무가 쉬워지는 것 만은 아니다. 타인을 자기의 눈 높이에 맞추도록 하는 것 보다, 자신이 타인의 눈 높이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와 얘기를 할 때는 어린아이 눈 높이까지 앉아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자신과는 여러 조건이 다른 공립학교에서 아들이 또래의 동무들과 잘 어깨동무하는 법을 터득하기 바라는 그 어머니의 바램이 이루어지길 바랬다.

지난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한국 나갔을 때도 내 어깨동무들이 와서 나를 위로해 주고 갔다. 6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고 찾아준 동무들이다.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어렸을 때 보다 더 멀고 커졌지만 나를 너무나도 잘 알았던 동무들이 와서 함께 눈물을 훔치며 어깨동무해 주고 갔다.

그 동무들이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