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사내 그리고 나무새 / 정태헌
궁리 끝에 하냥 바라보기로 했다.
지난겨울, 지인이 꽃 이름까지 곁들인 난분을 집으로 보내왔다. 거실 모서리 탁자에 놀려놓고 우정에 보답도 할 겸 틈나는 대로 바라보며 눈정을 나누곤 했다. 꽃차례가 가지런하고 꽃숭어리가 수련하여 완상하는 눈맛이 소쇄하기 그지없었다. 해동(解凍) 후엔 볕과 통풍을 생각해 거처를 앞 베란다로 옮겨주었다. 화초에 손방인 내게 와서 겨울과 봄을 나고 여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 잎과 줄기가 무탈한 것을 보면, 내 눈길과 보살핌이 쓸모없지는 않았나 보다.
한데 참 이상한 일이다. 두 뼘쯤 되는 세 개의 꽃대에서 갓맑은 자태를 뽐내던 꽃들은 이울어 하롱하롱 졌건만, 가장 긴 꽃대 끝 꽃자루에서 핀 꽃송이 하나는 지금껏 줄기차게 매달려 있다. 벌써 두 철을 넘기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했는데 이즘은 외려 마음이 흔들린다. 때가 되면 낙화하는 게 그들의 생리이거늘, 저토록 오래 피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하였다. 혹시 석고처럼 굳어진 것은 아닐까. 꽃자루에 매달린 채 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조차 들어 다가가 눈여겨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 흰 꽃잎은 물론이거니와 메마르긴 했지만 꽃자루 또한 올곧았기 때문이다.
까닭 모를 노파심에 꽃송이를 그만 똑 따버릴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는 일,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산등선마루를 묵연히 바라보다가 낙화의 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철을 이겨내고 머물러서 이루고자 하는 어떤 간절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꽃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먼 산등성마루에 시선을 맞춘 채 흐트러짐이 없이 도저하다.
꽃을 보노라면 그 사내의 모습이 갈마든다. 꽃과 사내는 닮았다. 그 사내는 산등성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다른 뿐이다. 사내를 처음 발견한 것은 달포 전 산책길에서다. 그즈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사내는 이야깃거리였다. 사내는 해뜰참부터 해물녘까지 햇볕 아래서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십 전후, 그는 산자락을 끼고 있는 저수지 둑에 앉거나 서 있었다. 그날, 나 또한 그를 처음 보았지만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얼굴은 볕에 그을렸으며 고집스레 보이는 검정색 굵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궁금했다. 며칠 후, 산책 중에 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표정은 새무룩했지만 허우대는 멀쩡한 사내였다. 인기척에도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 붙박인 채 허공에 눈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입성은 검정 바지에 흰 점퍼 차림이었는데 점퍼 곳곳에는 때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누군지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 같다고 하기도 하고, 마약을 한 사람 같으니 신고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사내를 만난 지 열흘 쯤 되던 날이었다. 저수지 둑길에서 그의 곁을 또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왼손엔 종이컵까지 들려 있었다. 소주잔인지 커피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눈길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한데 그날따라 사내의 얼굴엔 미소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일까. 나도 무심코 그의 눈길을 좇았다. 허공엔 산새 몇 마리 저편 솔수펑으로 날아가고, 몇 점 구름이 흐를 뿐이었다. 몇 발짝 걷다가 등 돌려 다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저게 뭐야.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짯짯이 바라보았다. 구름발치에 무언가 눈에 잡혔다. 낮달이었다. 낮달이 저편 하늘가에 우련하게 떠 있었다. 흔치 않은 낮달, 사내는 그걸 보고 새무룩했던 얼굴이 저리 펴졌을까. 흐르는 구름, 날아가는 새, 달려가는 바람도 낮달 곁에 있었다. 하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그때마다 침을 삼키고 콧마루를 옴씰거리며 눈빛이 반짝였을 것만 같다. 하여 입초리에 미소까지 찾아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낮달을 발견한 사내와 같은 눈빛이 된 적이 있다.
연전, 노을 지는 섬진강변 마을 어귀에서 마주친 허공의 새 한 마리가 내 눈길과 발길을 붙잡았다. 우주목(木)과 목조(木鳥), 바람 불면 긴 장대 위에서 강 건너 앞산 자락을 타고 훨훨 날아오를 것만 같은, 허공에 떠서 바람 앞에 앉아 있는 나무새였다. 그 나무새는 허공에 떠 바람 속에 있기에 외려 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꽃 속에서 사내를 보고, 사내의 그 눈길에서 내 속뜰을 본 것일까.
이울어 지지 않는 꽃송이를 따내 버리려던 내 마음을 외려 따버린다. 먼 산등성이 조금이라도 더 가깝도록 한 송이 꽃을 떠받들고 있는 난분을 유리창가로 바투 밀어준다. 이젠 꽃이 스스로 질 때까지 이윽토록 바라볼 참이다. 제 꽃철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 낮달 보고 미소 짓는 사내, 그 곁에서 나도 나무새가 되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