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똥이 / 이난호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어 자취를 감춘 단어 중에 '조선'이란 말이 있다. 어떤 단어 앞에 이 '조선'이란 말이 붙으면, 마냥 소박한 것, 가장 우리 것다운 것으로 쑥 다가왔고 얼마쯤은 진국이라는 다소 예스런 의미의 어떤 향수까지 묻혀와 단박 유년기 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었는데, 가령 '조선 참외' 하면 개구리참외나 작고 동글반반하고 샛노란 참외를, '조선무' 하면 짤막하고 통통하고 속이 단단해서 날것으로 먹기는 맵고 빡빡하지만 일단 김치류로 갈무리되면 긴 겨울을 나고도 다음해 한여름까지 생생하니 든든한 밑반찬으로 버텨주는 무를 일컬었던 것이다.
조선간장은 어떤가. 햇콩을 오래 삶아 빚어 띄운 메주로 역시 제 입맛에 간 맞춰 담근 재래식 장, 이곳에 '조선'이란 구별 칭호가 붙게 된 건 싱거운 간장이 건강에 좋고 어쩌고 하며 화학간장이 득세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조선 밤, 조선 닭, 조선 옷으로 불리던 우리 것들은 또다시 토종 닭, 한복으로 개칭되어 호응하니 마치 내 대신 내 자리를 차지한 이를 보는 느낌이 들어 한동안 서먹했었다.
더러는 민감하게 시류를 타기도 하고 더러는 나라님 입맛 때문에 발음해서는 안 되는 말로 '조선'은 그렇게 스러져갔다. 온갖 '조선'스런 것들, 특히 맛깔스런 먹거리들이 개량되어 시큼들큼한 국적불명의 맛에 모양새까지 바뀌면서 좀 촌스럽다 싶은 건 모조리 '신토불이'로 뭉뚱그려진 지 오랜 지금도 나는 별수 없이 어릴 때부터 혀에 배어든 그 '조선' 맛에 끌리니 내 이 입맛마저 어디에 신고를 해 허락받아 누려야 할 사안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생 개똥이의 짓궂은 행태를 떠올리다가 그의 별명 앞에 '조선'을 붙여보니 희한하게도 한결 더 그다운 맛이 돌아 혼자 웃은 적이 있다.
초교 동기엔 개똥이를 다시 본 건 몇 년 전 서울과 고향 당진의 중간쯤인 온양에서 열린 근 사십 년 만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였다. 장년을 훨씬 넘긴 동창생들은 저마다 나름의 '자리'가 잡혀 처음 분위기는 다소 서먹했다. 기업체사장, 농사꾼, 한의사, 쌀장수, 대학교수, 운전기사, 시인, 생활설계사, 보석상 등, 그들 누구도 먼저 손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걸쭉한 상소리로 안하무인 회의장을 휘젓는 이가 개똥이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누르무레한 점퍼를 걸친 게 갈 데 없는 촌로, 시커먼 눈썹과 우람한 허우대는 여전했다. 그 입에 붙은 상소리 때문에 동기 여학생 쪽에서 저런 망종과 자릴 함께 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는 짜증스런 비명이 거푸 터졌다.
"야잇, 배워 처먹은 놈들아! 나라나 동네나 드없게 후질르른 놈덜은 다 이들 배워 처먹은 놈덜이더라 이겨! 나 같은 촌 무지랭덜이야 평생 땅이나 파고 여편네의…."
원래 그런 모임이라는 게 회장의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술잔 나르기가 시작되면 이어 예제서 고함이 터지고 유행가 뽑고 삽시간에 헝클어지기 마련임에 웬만큼은 익숙해질 연배들임에도 개똥이의 건주정엔 난감하다는 눈길이었다. 그 판에서 나는 '후질른다(더럽힌다)'는 고향 사투리를 듣자 속이 흥건해졌다. 까마득한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당진 토박이지만 나는 아직도 따라잡기 막막한 고향 사투리가 적잖다. 충청도 특유의 배배 틀린 어투로 쉬이 내비치지 않는 그 메슥한 안개속셈 헤아리기까지 한참 걸릴 때가 많다. 그 모두가 그리워졌다. 그것들, 질기고 눈치 없는 것들, 그러나 끝내 불변으로 남는 것들, 결국 그리운 그것들이 갑자기 당겨지면서 나는 그날 내내 개똥이 쪽으로 목을 빼느라 동창회는 건성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개똥이는 교내 망종이었다. 특히 우리 조무래기 계집애들에게 그는 흡사 하늘을 덮는 매였다. 화장실을 휘저은 막대 끝에 시커먼 시궁 흙을 찍어 들고 유독 고운 분홍 명주 치마만 좇았고 놀이 고무줄을 물어 끊거나 길들인 사방치기 말목을 차고 달아났다. 그의 짙은 눈썹과 검고 큰 눈은 늘 음습해 그가 해코지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일 때라도 우리는 저만큼 에둘러 그를 피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딱 한번 불쌍해 보인 적이 있다. 자기보다 키 작은 상급생으로부터 심하게 뺨을 맞느라고 몸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릴 때였다. 무엇보다 늘 심술기를 담고 번들대던 두 눈이 착 내리깔려 있는 걸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그간 그에게 직간접으로 당한 분풀이라도 '깨소금 맛이다!' 할 법한데 그게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나는 그의 뺨을 쳐대는 상급생에게 강한 적의가 부풀고 있었다. 개똥이가 가만히 서서 뺨을 맞고 귀를 끌리고 그러지만 말고 냅다 그 상급생을 메다꽂기를 바랐다.
그의 얘기를 다시 듣게 된 건 내가 동기생 C와 혼인해 잠깐 시댁에 머물 때였다. 시댁에서 작은 재빼기 하나 너머에 선무당 '개똥어메'가 산다 했다. 개똥어메는 우리 친정 마을에서도 가끔 우환이나 치성致誠굿에 불릴 만큼 근동에 알려진 무당이었는데 개똥이가 바로 그의 외동아들이었던 것이다. 개똥어메의 탁한 목청과 당당한 체구와 시커먼 눈썹이 그대로 개똥이에게 내림했음이 단박 눈어림되었다. 굿터에 불려 다니느라 드나듦이 불규칙했을 과부 선무당의 외동아들이 혼자서 어떤 성장기를 보내야 했을지도 짐작이 갔다.
그 망종 개똥이가 바로 초등학교 시절 약골이던 남편 C의 전담 업저지였을 줄이야. C는 일곱 살에 집을 떠나 할머니와 큰댁에 살았다. 태생부터 그늘의 밀대처럼 약해서, 집안 식구들의 걱정 반 고임 반의 애물단지였는데 여름이면 맡아 놓고 학질虐疾에 걸렸다. 그 병의 특징이 하루는 정신이 오락가락할 만큼의 고열로 혼을 빼내고 다음 날은 말짱하고 그 다음날 아침나절까지도 생생하다가 한낮이 기울면서는 영락없이 흐물흐물해지는 악질惡疾이었다. 이 병엔 느닷없이 놀래주면 낫는다는 속설이 붙어 있어 열에 들뜬 채 끌려 나가 송아지와 입맞춤을 당하거나 뒷간 바닥을 핥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꼼짝없이 그 짓을 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었다.
학질 걸린 채 등교했던 C는 결국 조퇴를 한다. 당시 아픈 학생들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선심성 배려란 고작 조퇴를 허락하는 것이었고 그럴 때 근처에 사는 아이 하나를 보호자 겸 딸려 보내주는 게 상례였으니 개똥이가 매번 C에 붙는 보호자였다. 그로선 재미 하나 없는 교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감보다 고욤이 단' 이른바 활인活人이었음직하다. 개똥이는 체수 작은 C를 업고 내를 건너고 들길을 걸었다. 배고파 죽겠다면서 풀밭에 C를 부리고 함께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가 축 늘어진 C를 업고 대문을 들어서면 할머니는 손자를 받아 방에 눕히는 바람으로 서둘러 개똥이의 밥상부터 차렸다.
"그때 개똥이가 워찌나 밥을 달게 먹던지." 할머니가 회상하더라 했다. 입이 짧아 밥알을 헤듯 되새김질만 하는 손자만 보다가 소담한 개똥이의 밥숟가락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할머니는
"에미가 밖으로만 나도니 월마나 허기졌을 거여?" 늘 혀를 찼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C에게 개똥이가 한 첫마디 역시
"나, 느네 집 밥 많이 축냈지?" 였다. 이어 그는 말했다
"나 지금은… 밥은 먹구 살어."
'밥은 먹고 산다.'는 말은 자기 살림이 꽤 실하다는 충청도식 표현이다. 나는 괜히 고맙다. 어린 날 허기진 개똥이에게 박혔을 다디단 남의 집 밥맛 기억이, 개똥이에게 업혀 오며 죽음을 넘나들었다는 C의 엄살을 밀어내고 내 콧마루를 시큰 쳤다. 아무리 체구가 작다 해도 비슷한 또래인 환자를 업고 한여름 땡볕 아래를 걸었을 어린것의 허기를 먼저 헤아린 할머니. 당신의 아픈 손주 두 번 안 돌아보고 서둘러 서둘러 개똥이의 밥상부터 챙긴 할머니가 고마워서 새삼 나는 가슴이 후끈한다. 안 그랬다면 당신은 내 남편의 할머니, 조선의 어머니가 아니다!
동창회는 동요잔치로 끝막음되었다. 중노에 접어들어 모두 한 덩이로 어깨 겯고 부르는 어린 날의 동요는 우리를 금세 그 조붓한 시골 운동장으로 끌고 갔다. 누구라 거기서 쉬이 나오려 하겠나. 가까스로 얽힌 어깨들을 풀고 대강 서울행. 당진행 버스를 나눠 탔고 버스기사는 거푸 경적을 울려대는데도 몇몇은 아직 차 밖에서 밀고 당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앉은 차창 밖에서 뭔가 눈길에 걸려오는 게 있었다. 개똥이었다. 그는 한 손에 남편 손을 틀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 다급하게 반원을 그려 나에게 차에서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앉은 채 가만히 고개만 저었더니 그는 눈을 딱 부릅뜨고 이를 악물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힘껏 고개를 저었다. 개똥이의 팔짓이 느려지고 그 거뭇한 눈에 어떤 간절함이 담겼다. 자조나 비애 같기도 했다. '저런 눈을 묵살하면 두고두고 마음에 짐이 된다.' 나는 벌떡 일어나 튀어나갔다. 개똥이는 나와 남편의 손을 놓칠세라 양손에 하나씩 움켜쥐고 노천 커피점을 향해 거의 부르짖었다.
"여기요, 커피! 비싼 걸루다가 빨리 두개!"
나는 그가 건네는 커피를 억지로 마셨다. 개똥이는 그러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니들, 잘들 살어 잉? 잉?"
개똥이는 친정오라비처럼 양팔에 싸안았던 우리 어깨를 힘껏 조였다가 풀었다. 처음으로 가까이 본 개똥이의 눈은 더없이 맑았다. 그 눈에다 거푸 고개만 끄덕였다. 그 이름 앞에 '조선' 이름을 붙인 건 한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