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앞 풍경 / 서숙
저녁 무렵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늘 과일장사의 트럭이 서 있었다. 트럭 꽁무니에 나란히 놓인 바구니에는 과일들이 조금씩 담겨 있었는데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도 그리 실해 보이지는 않았다. 많지 않은 물량이 항상 고만고만했다. 그래도 지나치면서 몇천 원어치를 비닐봉지에 담아가곤 했다. 과일들의 때깔이 신통치 못한 대신 값이 쌌고 냉장고의 과일 칸을 쉽게 채울 수 있어 요긴했다. 트럭 주인은 낮에는 다른 일을 하는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저녁에 장사를 시작해 밤 9시쯤이면 접는 모양이었다. 성의껏 물건을 골라서 챙겨주는 모습이 유순하고 공손했다. 주변이 어둡기도 했지만 나는 대체로 무심한 편이라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가끔 트럭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네다섯 살 여자아이의 까만 눈동자에 눈을 맞추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과와 토마토, 참외에 시선이 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 앞이 시끌벅적했다. 새로 소형마트가 문을 열고 대대적인 판촉(販促) 행사를 벌이며 바겐세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야채와 수입 과일의 가격이 무척 쌌다. 나도 남들처럼 한 아름 사 들고 횡재한 기분이 되었다. 코앞에 생긴 마트 덕분에 장을 보기 위해 멀리 대형매장에 가려고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니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좋은 가격으로 간단히 찬거리와 일용품을 쉽게 충당할 수 있어서 돈도 시간도 절약이 되었다. 상점은 하루 종일 붐벼서 주인은 곧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동네 돈을 싹쓸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얼마 후, 어두운 골목에 접어드는데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트럭을 보자 불현듯 과일장사가 생각났다. 휘황한 마트의 불빛 아래 그만 그를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평소 많은 과일을 산 것도 아니고 그것들이 썩 마음에 흡족했던 것도 아닌데 뭔가 허전했다. 마트가 생겨서 참 편리해졌다고 좋아라 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어디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고 있을까. 마땅한 곳을 찾았을까.
이용에 편리한 마트가 생겨난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는 못했다. 비록 그가 여기에서 계속 과일들을 판다고 해도 아마 나는 그의 트럭을 차차 외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과일은 애초에 마트의 상품들과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경쟁이 되지 못했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마음을 언짢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상추·파 같은 푸성귀와 콩·팥·조 등 잡곡을 아파트 단지의 담벼락 아래 펼쳐놓고 팔던 할머니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평소 버스 정류장 주변답게 이런저런 잡상인들로 붐비던 인도는 점차 텅 비어갔고 끝내 버티던 편의점 자리에도 다른 업종이 들어섰다.
갈수록 성황을 누리는 마트에는 무척 많은 사람이 유니폼을 입고 활기차게 일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일자리, 든든한 직장이 생겨서 활력이 넘치는 것 같다. 그 과일장사도 트럭은 그만 몰고 이 가게에 취직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세 자영업자를 그만두고 큰 조직에 들어가 종업원이 되면 생활은 오히려 안정적일지 모른다. 문득 1970년대에 자작농(自作農)이었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도시로 옮겨 공장노동자가 되었던 민족의 대이동 시기가 떠올랐다.
예전에 노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얼마예요?" 묻고 얼마치를 달라고 청했다. 이제 마트에 들어서서 나는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신용카드 한 장을 뽑아들고 카운터 앞을 통과하면 된다. 앞으로는 일일이 상품의 바코드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자동 일괄 처리될 것이라고 한다. 카트를 끌고 지나가면 그 안의 물건들이 저절로 인식되어 결제된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 몸에 칩을 하나씩 심고 플라스틱 머니조차 필요 없는 전(全)자동화 시대가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놀랄 만치 빨리 변한다고는 해도 사람 살아가는 일은 좀처럼 안 변하기도 한다. 그런 시절이 와도 여전히 1톤 트럭에 낙과(落果)를 주워서 싣고 여기저기 뜨내기로 좌판을 벌이는 사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비어 있던 마트 앞 공간이 그 마트에서 취급하지 않는 품목들을 파는 노점상들로 하나 둘 다시 채워지고 있다. 양말장사, 붕어빵장사…. 그 과일장사도 취급 물품을 바꿨을까? 종종 과일을 사면서도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 나의 사람됨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의 얼굴을 잘 봐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어디에서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고, 그때 반갑게 살짝 아는 체를 하며 트럭 안에 얌전히 앉아 있던 꼬마의 안부도 물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