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만들기 / 조이섭
수필 선생님이 수필 쓰는 이야기를 글감으로 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애당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거나 용을 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터, 수필 쓰기에 대한 소회를 그냥 한번 풀어보렵니다.
사십여 년간의 월급쟁이 굴레를 벗고 보니 별안간 시간이 쓰고 남을 만큼 부자가 되어 있더군요. 우울이라는 놈이 친구 하자고 꼬드기기 전에 무언가 할 일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수필을 만났습니다.
수필 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을 찾아보니 더러 있습디다. 누가 참 좋더라 하는 데를 컴퓨터로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쳐넣었더니 화면이 덜컥 ‘신청 완료’로 기분 좋게 바뀌더라고요. 옛날에는 이런 것을 하려면 직접 가서 종이 신청서에다 빈칸을 성실하게 메우고 도장에 인주 묻혀서 꾹 찍었잖아요. 우리 모두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수필 선생님이 구수하게 풀고 늘어지고 당기시는 밀당이 장난이 아니더구먼요. 저절로 다음 강의시간이 기다려집디다. 옆자리를 힐끔거려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학생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니 빛나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습디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모두 문학소년, 소녀같은 맑은 모습입디다. 나야 물론, 속이 시커먼 그렇고 그런 놈입니다마는.
무엇이든 간에 일단 한번 써 보라고 내남없이 부추기는 바람에, 한 번 써볼까 하고 마음을 내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자판으로 옮기다 보니, 개발 새발이거나 말거나 에이포 용지로 너덧 장은 금방 채워집디다.
흥부네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린 것처럼 수필 한 편이 프린터에서 졸졸졸 모양 있게 나옵디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것 뭐, 별거 아니구먼. 시장기 돌 때 밥 한 공기 뚝딱 했을 때처럼 포만감이 밀려듭디다.
차를 한잔 마시고 컴퓨터를 다시 엽니다. 어이쿠, 조금 전까지 줄을 잘 서 있던 글자들이 그 사이에 무슨 사달이 났나 봅니다. 어디 시골 장터에서 탁배기를 마시고 왔는지 했던 소리 또 하는 놈, 삐뚤삐뚤한 놈, 쓸데없는 쭉정이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청자를 구우려고 했는데 이건 사발인지 옹기인지도 모를 만큼 완전 개판 오 분 전이 되어 있습디다.
이런 고얀 놈들을 그냥 둘 수야 없지요. 대파 다듬듯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수돗가에서 쓸데없이 묻은 흙이나 농약을 찬물로 헹굽니다. 둥근 대는 한 껍질 벗겨 하얀 속살이 드러나게 합니다. 새파란 성한 잎만 남겨두고 누렇게 바랜 것은 추려냅니다. 아 참, 뿌리는 다음에 약으로 쓸 수 있도록 잘 씻어 따로 냉장고에 넣어 둡니다.
글의 순서를 잡고, 들고 날 때를 짚어 뼈대를 세웁니다. 초록은 초록끼리 빨강은 빨강끼리 색깔도 맞춥니다. 옛사람들은 이런 짓을 퇴고推敲라 했다지요. 이 짓을 며칠 동안 지겹게 하고 있습니다. 이놈들이 말을 들어먹지를 않아요. 한 번 만에 마음에 딱 들게 한 적이 없어요.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퇴고랍시고 할 때마다 주머니에 숨겨 둔 송곳처럼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놈이 꼭 있더라고요. 징하게.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글 쓰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옛날 선비들은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짓고, 한 번의 붓놀림으로 기생 치마폭에 난초를 심는다고 하지 않습디까. 그런데 나는 이 놈들 줄 세우고 쭉정이 까부르느라 키질만 하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이 참 한심하고 주제넘다 못해 자괴감마저 듭니다. 학 때리 치아뿌까!
며칠이 지났습니다. 홧김에 젖먹이 떼놓고 도망 나온 계집처럼 내팽개쳐 둔 것들이 생각나 슬그머니 컴퓨터 뚜껑을 열어 봤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째 좀 귀엽기도 하대요. 고슴도치 새끼마냥 말입니다. 처음보다 쭉정이들이 많이 날아가고 괴발개발 하던 것들은 제법 다듬어져 있습디다. 곰곰 생각개보니, 퇴고라는 작업을 통하여 들어내고 깎아 낸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이 생각났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만들 때, 먼저 끝이 뾰족한 수비아를 사용해서 큰 덩어리를 떼어낸 다음, ‘그라디노’라는 갈고리 모양의 끌로 섬세한 작업을 하고, 마지막으로 아주 가는 스카펠로를 사용하여 작품을 거의 완성한 뒤, 줄질로 최종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대리석 원석을 단지 깎고 다듬어서 만든 것입니다.
멀리 이탈리아까지 갈 것도 없네요. 불국사 석굴암에 정좌하고 있는 본존 여래상도 석공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들어내 버린 것 아닙니까. 미술대학 학생들이 아그리파나 줄리앙과 같은 석고 두상을 소묘素描하는 것을 보면, 연필로 그리느 시간보다 지우개로 지우는 시간이 오히려 많은 것 같습디다.
난삽한 글자들을 다듬어 고슴도치만큼이라도 글 모양을 갖추어 내는 과정, 그 퇴고라는 것 말입니다. 조각이랑 소묘랑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쭉정이 골라내고 파 다듬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이제는 ‘수필을 쓴다.’를 ‘수필을 만든다.’로 고쳐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글쓰기든, 조각이든, 소묘든, 세상을 사는 이치는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도 최고 경지에 이르면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이혜인 수녀님처럼 무불통無不通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끊임없이 퇴고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살아오면서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지우고 깎아내야 할 것들을 오늘도 미련스럽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저인들 큰소리칠 입장은 전혀 아닙디다. 남을 험담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하면서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나쁘게 하면 분해했고요.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은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습니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불같이 화를 낸 일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삶의 더께보다 버려야 할 것들이 더 많은 저로서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수필을 만들면서 인생도 함께 다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필 한 편에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이라도 실어 보낼 수 있다면. ‘술 한 잔에 시 한 수’의 경지에 오른 것보다 뿌듯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면 얼마나 많은 새벽을 만나야 할까요.
문학 길을 함께 떠나는 도반들과 막걸리 한 잔으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수필을 등에 업고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할 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