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風聞) / 민명자
어떤 모임에서였다. 내가 무심코 아들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예쁜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들이 있으셨어요?”
의외라는 표정이다. 내막을 들은즉슨, 어디서인가 누구인가로부터 ‘민명자는 골드미스다’라고 들었단다. 수문장 같은 남편이 떡 버티고 있고 손주까지 올망졸망 둔 마당에 어째 이리 황당한 풍문이 떠돌았을까. 성모 마리아처럼 무염시태(無染始胎)를 할 리도 없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골드미스인 내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나이를 물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게다.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얼마쯤이나 돼 보여요?–한 오십 초반? 중반?–에고, 고맙기도 해라. 무척 젊게 봐주시네.”
우린 이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느 새 실버세대라는 인생계급장을 달게 되었으니 나이 강등이 고맙기조차 하다. 그런데 조금 더 이야기를 듣다보니 점입가경이다. 골드미스라는 안경을 쓰고 나를 바라보니까 모든 게 그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나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던 그녀와 친구는 자기들끼리 이렇게 속살거렸단다. ‘저거 봐, 화장도 안 했는데 골드미스니까 피부가 끝내주잖아. 골드미스니까 걸음걸이도 당당하잖아.’
오호, 내 걸음걸이가 그리도 당당했던가. 내가 평소에 화장을 그다지 표 나지 않게 하는 편이고, 학창시절에는 마른 몸에 등을 구부리고 걸어서 ‘고사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걸 그녀들은 모르리라. 내가 보기엔 젊고 고운 그들이건만 막상 자신들은 늙었다고 자탄까지 했다는 소리마저 들으니 새물새물 웃음이 삐져나온다. 헛소문도 이 정도면 과히 나쁘지 않다.
얼마 전에는 이미 타계했다고 알려진 지인을 만나서 당황한 일도 있었다. 서로 격조했던 터에 그녀가 타계했다는 소문을 뒤늦게 듣고는, 이른 나이에 어쩌다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무척 애석해했다. 내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귀신이 살아서 걸어오는 줄 알고 놀랐겠다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으니 그 덕분에 오래 살 거라며 살아있음을 기뻐했다. 알고 보니 세상을 떠난 건 그녀의 언니였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내게 내내 죽은 사람으로 남을 뻔했다.
풍문은 실버를 골드로 만들고 산 사람도 죽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도 이렇게 진위가 금방 가려지는 일들은 나은 편이다. 확인되지 않은 나쁜 풍문 때문에 누군가는 목숨도 버리지 않는가.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짜 진실이 독을 담은 풍선을 달고 떠돌아다닌다. 바람의 신에게 부탁해서 나쁜 풍문은 아예 자루에 꽁꽁 묶어 동굴 속에 가둬달라고 하고 싶지만 당치도 않으니 딱하다.
‘ 누구누구는 어떻더래요’라는, 이른바 ‘카더라’풍문 뒤에는 대부분 ‘알나리깔나리’가 숨어있다. 이런 풍문을 제일 잘 활용한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薯童)이 아닐까싶다.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 가 두고/맛둥(薯童) 도련님을/밤에 몰래 안으러 간다네– 말하자면 ‘누구누구는 누구누구랑 무얼 했대요, 알나리깔나리’라는 식의 노래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고 왕까지 된 서동이야말로 거짓소문으로 인생대역전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설화야 낭만적 접근을 허용하지만 설화상실의 시대에 현대판 서동이 있다면 더 이상 온정적 시선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여러 상징적 의미를 젖혀두고 풍문으로만 보면 선화공주 입장에서는 대궐에서 쫓겨나 귀양까지 가게 되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게다. 더구나 뜬소문만 믿고 선화공주를 내몬 조정백관들은 또 어떤가.
요즘에는 인터넷이라는 동굴에서 퍼져 나오는 풍문들이 큰 위력을 발휘한다. 열린 듯 유폐된 공간에서 실체가 가려진 진실의 그림자만을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한다. 그렇게 자신이 정한 잣대 안에서 외눈박이가 된 다수의 원숭이들 틈에서는 두눈박이 원숭이가 불구자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인식은 과연 믿을만한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만 보더라도 이미 오래전에 장자(莊子)는 미추 구별이 인간의 잣대에 의한 것임을 천명했거니와, 데이비드 흄은 ‘미(美)는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한때 주순호치(朱脣晧齒)라 하여 앵두처럼 작고 붉은 입술과 새하얀 치아를 미인의 조건 중 하나로 삼았지만, 에티오피아의 무르시족은 아랫입술을 뚫어 큰 접시를 낄수록 미인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인간이 처한 환경과 관점에 따라 미의 기준도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저자 김찬호가 드는 예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에서 백인이 살고 있는 집 앞의 쓰레기통이 나동그라지고 쓰레기가 흩어져 있으면 대개 ‘어느 집 개가 먹을 걸 찾느라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흑인이나 인디언 집 앞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 ‘저 사람들은 늘 저렇게 돼지처럼 산다’고 비웃는 게 보통이란다. 우리도 마찬가지라서, 예컨대 똑같은 실수를 해도 일류대 출신이 했을 때는 ‘어쩌다 그랬겠지’라고 넘기는 반면 지방대 출신이 그랬을 때는 ‘역시 어쩔 수 없단 말이야’라고 멸시하는 관리자일지라도 자신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이럴진대 하물며 풍문은 더 말해 무엇 하랴. 실버든 골드든지 간에, 나를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내 이미지가 백인천색으로 각인되어 있을 게다. 그렇다고 여기에 토를 다는 건 의미가 없다. 다만, ‘그들이 바라보는 나’보다 더 유념해야 할 건 ‘그들을 바라보는 나’ 또는 ‘내가 바라보는 나’일 것이다. 내가 합당하다고 믿는 가치관이나 주관이라는 것도 주입된 학습효과나 환경으로 버무려진 비빔밥 같은 건 아닐까.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은 과연 진실일까. 앞만 보면서 옆으로는 아예 고개를 돌리려 하지도 않는다거나, 앞만 보고 뒤까지 보았다고 할 때는 없는가.
삶이란 매순간 선택이라는 점을 찍으며 직선이나 곡선을 그려가는 과정이니 주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편견과 평생 친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순리의 궤도 따라 마음도 따라 도는 게 최선이리라. 낙서처럼 그려진 마음속 풍경들을 잠시라도 지우고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면서 무색무취의 물처럼 흘러가는 것도 좋으련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버를 골드로 만든 풍문은 다행히도 ‘예쁜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를 만나면 반갑고 유쾌하다. 어차피 풍문이 난분분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훈풍에 싹이 돋듯 웃음과 생명의 묘약이 되는 풍문이나 많기를 기대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