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열차 / 최민자

 

 

 

익산 가는 KTX, 타고 보니 역방향이다. 눈은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몸이 계속 뒷걸음질을 한다. 아니, 앞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눈이 뒤를 보고 있는 형국인가. 첨엔 낯설고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앞을 향해 가고는 있어도 뒤를 돌아봐야 이해가 되는, 사는 일도 어쩌면 역주행 아닌가. 인간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도 끊임없이 뒤를 보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현재는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현재 뿐이다.' 누구는 또 그렇게 말한다. 지나버린 시간을 과거로 뭉뚱그리고 오지 않는 시간을 미래로 떠밀어두는 사람들에게 현재란 찰나적 경계일 뿐이다. 찰나란 사전적으로 75분의 1. 0.0013초 정도라 하니 우리가 느끼는 현재란 감촉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현재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현재뿐이라 말하는 사람이나 현재를 만끽하긴 어려울 거란 이야기다.

현재의 부재가 현재의 의미를 강화하는가. 극단의 허무주의와 극단의 실존주의가 내통해서인가. 깨달은 자들은 저마다 현재에 집중하라고 한다. 'Carpe diem'이니 'now & here', 말이야 멋있고 그럴싸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현재라는 지면地面은 겹겹의 시간이 중첩되고 퇴적된 과거라는 지층地層의 표층일 뿐이다. 켜켜이 밀려드는 내일이 오늘이 되어 어제로 끌어내려지고 또 다른 내일을 잡아당겨 한 뭉텅이의 과거로 휩쓸어 넣는다. 오지 않을 것들과 가버린 것들 사이에서 시간의 중력을 견디고 버티며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아슬아슬한 실존, 그것이 ', 지금 여기'의 본 모습일 것이다.

어느 날엔가 사막을 다녀온 친구가 말했다. 사막에는 역사가 없더라고, 3 4일을 달려가 겨우 우물 하나 보고 왔다. 닭도, 달걀도, 사막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사막에 왜 역사가 없을까. 시간이 축적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과거라는 이름의 집적이 없으면 삶은 순간의 산화酸化일 뿐, 자연도 인간도 시간과 밀땅밀땅 드잡이를 하면서 저마다의 서사성敍事性을 획득해간다.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온갖 무지갯빛 내일이 아니라 시들고 뭉개진 어제들이란 말이다.

차장 밖으로 나무들이 스쳐간다. 스쳐간 나무들이 저만치 멀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돌아보며 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시간은 그렇게 풍경이 된다. 손을 뻗어 봐도 닿을 수 없는, 원경遠景으로 자꾸 멀어져가는, 예전에 나는 당연하게도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여겼다. 요즘은 아니다. 아니라 생각한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든다, 꿈이 현실로 다가앉고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뒤돌아보듯, 시간은 저 아득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끝자락에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와 컴컴하고 불가사의한 발 밑 구멍 속으로 시끄럽게 빨려 들어간다.

시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든, 아니면 제자리를 빙빙 돌던,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람들은 시간에 마디를 정하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의 보폭을 재려 하지만 삶에는 오직 하나의 시제 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부질없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태어나 지금 이 순간까지, 내 몸에 축적된 시간만이, 현재완료진행형의 실존만이 진실이다. 현재완료진행형으로 가다가 과거완료로 불시 변환되어버리는, 그것이 우리네 일생 아닐까. 흔들거리고 덜커덩거리며 시간의 자기장이 미치지 못하는 무중력의 차원에까지 탈주해가는, 역주행이 정주행인 이상한 여정旅程, 그것이 지금 내가 몸을 싣고 달리는 이 열차의 노정이고 좌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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