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손님
이난호
생솔 타는 냄새가 났다. 구들이 따스해 오자 허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버님은 기침(起寢)하시는 바람으로 대문부터 열어 젖들이시니 돌쩌귀 물려 도는 소리가 요란했을 텐데 못 들었다. 유독 초저녁잠이 많은 내가 왜 하필 서툰 새아기 노릇 발에 새벽잠이 쏟아져 시어른 기척에도 이리 청처짐한 걸까. 힘껏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김에 허리를 들었다.
"왜 벌써 ..."
아버님은 굵은 솔가지를 무릎에 대고 딱 꺽으며 말끝을 흐리신다. 물이 아직 데워지지 않았을 거라는, 아니 방학을 맞아 아침 급할 거 없으니 다순 구들 맛 좀 더 봐도 좋다는 에둘음이리라. 나는 솥전에 손을 대보고 뜨거운데요 한다... ,그말을 속으로 한번 더 한다. 뜨거운데요 , 아버님. 내가 당신 진지 상을 당신 코앞에다 좌르르 쏟았을 때 일회적으로 아버님의 목소리가 튀었었다.
"발,발, 발 다칠라..."
나는 그때 목이 뜨거워져 면구해 할 겨를도 없었다. 시골 살림에 손방인 대처 새아기를 어떡하면 표 안 나게 챙겨줄까 구메구메 기웃대시는 아버님은 그러나 아직 나를 반쯤 외면하시며 매번 말끝을 흐린다.
두멍에서 찬물 한 바가지를 퍼 더운 물에 붓고 크게 휘저어 보고 쌀을 씻는다.
"맨밥은 싱거워서...,"
아버님의 혼잣말이 좀 크다. 나는 불린 콩을 소리나게 솥바닥에 떨어뜨린다. 그 위에 수숫쌀과 팥 한줌을 얹고 쌀로 덮는다.
"청솔, 설녹으면 질깃해서...,"
아버님은 그 핑계로 밥솥 아궁이도 차지하신다. 나의 왕겻불 살리기와 눅진한 청솔 태우기 실력은 진작 몇번의 죽탕밥으로 드러나 큰시뉘의 지청구를 사온 터, 아버님의 청솔을 핑계로 밥솥 아궁이를 차지할 명분을 세우시니 후끈한 속내를 감추고 얼른 네.한다. 기실 빳빳이 언 생솔은 부엌에 드나드는 길로 이내 눅어 질깃해지면서 좀체 불이 붙지 않는다. 엎드려 입바람을 불어 넣노라면 어느 순간 확하고 긴 불길이 역류해 앞머리에 그슬리며 코눈물 범벅이 되는 사이 밥쌀은 불어 곤죽으로 풀렸다.
밥솥 뒤에 걸린 옹솥에 콩나물국을 안치고 뚝배기를 들고 김칫광으로 가 호박지를 담아 밥솥에 박는다. 간 저녁에 남긴 김치에 된장을 뭉개고 들깨묵 가루를 버무린 뚝배기도 박는다. 작은 뚝배기에 갈치 자반을 몇 토막 쟁이고 끝물 고촛가루를 흩뿌려 박는다. 두어 번의 눈동냥 깜냥으로 계속 손을 놀린다. 나는 작은 국자와 뱅뱅이를 들고 다시 김칫광으로 간다. 동치미 냄새는 뚜껑을 열기 전부터 진동했는데 정작 뚜껑을 여니 허연 얼음이 그득하다. 요행 얼음 복판에 보시기만큼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으로 삭힌 고추가 동동 떠올라 있다. 잎이 달린 동치미 무를 한 개 꺼내 서리고 실파를 몇오라기 걷어 담고 살얼음과 함께 삭힌 고추를 몇국자 뜬다. 그때부터 동치미를 썰어 보시기에 담고 국물을 붓고 실파를 잘라 삭힌 고추와 나란히 띄우는 내내 나는 속으로 박하 맛일거야 뇌었다. 장독대로 가 재래 간장에 절인 풋고추를 꺼내다 잔칼질을 한다. 아버님이 선호하셔서 매번 상에 올리면서도 그 얀정머리 없이 짠 맛에 진저리쳤었는데 생뚱맞게 맵짠 냄새가 코에 감긴다. 배추김치를 썰면서는 잔뜩 외면하고 깍두기는 한 개 집어 먹었다.
아버님은 펌프 물을 두어 동이 들어다 붓고는 시동생들의 방을 향해 큰 기침을 두어번 하시더니 곧, 얼릉덜 일어나아.밥 다아 식넌다,하셨다. 밥짖는 소리가 멎었다. 나는 아궁이 속을 뒤집어 불땀을 돋우고 밥솥에 박았던 뚝배기 세 개를 꺼내 이 맞춰 앉힌다. 콩이 눅는 냄새, 호박지 냄새 들깨된장 냄새 갈치자반에 흩뿌린 풋고추 냄새에 식욕이 뻗쳐 아찔할 지경이다. 찌개를 뒤적이는 척 호박지와 된장찌개를 번갈아 떠 먹으며 방문 여닫는 소리를 고대한다. 아홉 식구들이 세수를 모두 마쳐야 밥상을 차릴 수 있다. 마당을 쓸고 들어온 큰 시동생이 양동이에 더운 물을 퍼 담는다. 상일꾼도 아니면서 왜 아침마다 머릴 감느냐고 아버님이 신칙하신다.
식구들 세숫물이 달릴까 보다 내 설거지물 걱정을 하시는 것이리라.방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시뉘 시동생이 차례로 펌프에서 찬물 한 바가지 씩 퍼와 솥에 붙고 휘저어 물을 퍼들고 나간다. 지켜보시던 아버님이 기어이 커다란 등걸을 통째로 아궁이 깊숙이 박는다. 진종일 은근히 타면서 물과 방구들을 데울 것이다. 막내 시뉘가 고구마를 구울 것이고 배추뿌리를 깎아 든 작은시동생이 바꿔 먹자고 애걸할 것이다. 눈발이라도 날린다면 마실꾼들이 모여들 것이고 나는 가마솥 그득 고구마를 삶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 마른 삭정이를 땔 수 있다. 흐린 날이면 굴뚝 연기가 거꾸로 토해져 부엌을 가득 채우고 안방으로 스며 마실꾼들이 마시게 되니 순한 불질을 해야 한다.
시댁 식구들은 일제히 콩나물국에 깍두기를 풀었다. 거기에다 아버님은 새우젓도 넣고 다진 고추도 듬뿍 뿌린다. 밥을 반쯤 덜어 툭툭 꺼 놓으니 얼핏 오색 고명을 얹은 빙수 같다. 나는 그 텁텁한 국밥말이를 극구 외면한다. 밥과 국과 반찬은 한 가지씩 떠야 하고 숟가락가 젓가락을 한꺼번에 쥐지 않으며..., 지금은 흐지부지 된 지 오랜 친정 식습관을 들어 새삼 국밥말이를 상스럽다고 나지리 보려 든다. 식욕이 꺼진다. 빙수를 연상한 게 불찰, 나는 한여름 서울 복판에서 친구들에 둘려 빙수집에 있다! 얘들아.눈앞이 뿌애진다. 부아를 지르듯 다진 고추를 떠다 밥을 비빈다. 큰시뉘가 보고는,달래는 아직 멀었으니 움파라도 꺼내 초간장을 만들까 한다. 온몸이 쫑긋한다. 무 구덩이에 껴묻혀 노래진 움파는 초간장 감이었고 설을 넘기기 전 무맛은 아직 달았다. 일부러 크게 뜬 밥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찰나 누군가가 트림을 했다. 텁텁한 국밥말이 냄새가 풍겼다. 나는 수저를 놓고 입을 막았다. 모두 수저를 든 채 나를 봤다. 어머님 눈이 유독 반짝했다.
이듬해 여름 막바지 나는 첫아이를 끼고 누워 생솔 타는 냄새를 생각했다. 겨울 초입 안개 알갱이만한 기미(機微)로 내게 온 손님,아들애가 아버님을 닮았다고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