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보리밭 / 유혜자

 

 


스튜디오 밖의 하늘이 일기예보대로 맑고 푸르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해마다 이맘때면 이 노래를 자주 방송한다. 이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들으면서 내 귓가에 또 하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보리밭 길을 지날 때 듣던, 바람에 사락사락 이삭이 스치던 소리, 무성하게 물결치는 밭이랑을 따라 내 기억의 이랑을 거닐 수 있기 때문이다. 열 살 무렵 5월은 무척이나 해가 길었던 것 같았다. 첫 여름의 구름이 한가로울 때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들판과 둑길을 자주 돌아다녔다.

어느 날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순자네 집에 오디를 따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허연 포장을 한 초라한 상여를 만났다. 친구 진영이는 어른들의 말처럼 재수가 좋겠다고 신나했다. 나는 발에 안 맞는 짚신을 끌고 훌쩍이며 가는 어린 상주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설익은 오디가 유난히도 신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엔 문둥이가 온다고 진영이가 소리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까지 달려 왔다.
문둥이도 무섭고 어린 상주도 불쌍해서 동네에서만 놀던 해가 긴 5월, 정숙이네 집에 갔을 때다. 표지 안쪽에 손가락 마디가 끊어진 손의 사진이 있는 책을 봤다. '보리피리 불며…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가도 가도 황톳길… 양말 한 짝 벗으면 발가락 한 마디가 떨어지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이런 섬뜩하고 눈물겨운 구절들이 적힌 한자 섞인 한하운 시집이었다.

어머나! 보리밭을 지나면 눈썹과 손가락 없는 문둥이가 애들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잡아먹는다고 했는데… 그토록 무서운 문둥이가 이런 슬프고 예쁜 시를 쓰다니, 더욱이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서 푸른 하늘 푸른 들을 맘대로 날고 싶다는 그 소원이 너무 불쌍해서 어린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 뒤로 보리밭 길을 지날 때 보리이삭이 사락사락 스치면 한하운의 슬픈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만 했다. 문둥이는 어디서 굶어 죽지 않았을까? 그리고 순자네 집에 갈 때 만난 어린 상주는 어디서 보리피리라도 불고 있지 않을까? 풋풋한 보리밭 길에 나가서 나는 그만 슬픔의 싹만 트고 말았던 것이다. 싱싱해야 할 푸른 혼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문둥이 시인에 대한 애상으로 얼룩져버렸다.

보리밭을 지나도 서러움이나 무서움을 잊은 지 오래던 중학 시절, 학생기록 카드의 좋아하는 빛깔을 적는 난에 나는 초록색이라고 써넣었다. 보리밭과 상여와 문둥이 시인의 회고로 해서 내겐 초록빛 보리밭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무렵 초록색에 대한 애상적인 의미를 바꿔야 할 일이 생겼다, 최정희(崔貞熙)씨의 소설 <녹색(綠色)의 문>이 서울신문에 연재될 때였다. 주인공인 사춘기의 여학생 유보화는 "보리밭처럼 푸른 문 안에 사는 하늘의 왕자"를 사모하고 있었다. 나는 사춘기 이전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녹색의 문>의 주인공처럼 이성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지만 막연한 동경과 부푼 기대로 미래를 채색할 빛깔이 초록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픔이 아닌 순수한 동경과 기원 같은 초록빛으로 의미를 설정하려고 한 것이다.

5월이 되어도 보리밭 길을 쏘다닐 수 없는 도시로 떠나온 지 20년, 철없을 때 친숙했던 풀포기처럼 하늘거리는 보리밭 이랑이 그립다. 그 초록빛이 보고 싶다.
어린 날 느껴보던 죽음과 고통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 문학수업을 하거나 사색을 일삼는 철학도는 아니었다. 문학에 대한 희구가 사춘기에 싹텄을 때, 나는 <보리밭>, <해바라기> 등을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자른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폴 고갱이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한쪽 귀를 잘못 그린 것 같다고 했을 때, 고흐는 자기의 귀를 잘라 자화상에 대어 보이며 어디가 잘못 됐느냐고 따졌다고 한다. 고흐의 예술가로서의 처절한 심혼을 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문학지망 소녀로의 발돋움을 더욱 망설이게 했다.

고흐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얘기에 감탄을 했지만 소질도 없이 단순한 정서로 예술가의 꿈을 꾸려던 나는 용기를 얻는 대신 주저와 체념으로 아무런 기반을 다져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누렇게 익은 결실의 보리밭보다 이삭이 패지 않은 초록 보리밭을 좋아한다. 나는 성공 못한 회오나 불만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꿈의 초록밭에서 지칠 줄 모르는 어린 왕자로만 있고 싶은 것이다. 보리밭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젊고 푸른 보리밭만을 생각하고 싶다.

이제 내가 푸른 보리밭을 찾아 간다면 문둥이 시인의 소리나 애달픈 죽음을 생각하는 대신 풋풋한 의지를 묻혀오고 싶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밑, 차가운 눈발 아래서 억세게 가꿔 온 초록 보리밭처럼 내게 병들지 않게 가꿔 온 꿈이 남아 있다면 영글지는 않아도 좋다. 노래 한 곡조가 끝나면 다른 노래를 다시 틀어버리듯 내 초록빛 추억의 자락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다.

이제 보리밭 노래도 끝나버리고 창 너머 구름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내 마음은 푸르게 사락거리는 보리밭으로 달리고 있다.